영혼과 육신이 갈라지기 전, 마지막 기억의 맛
soul food: noun
“Traditional Southern African-American food, typically including items such as fried chicken, collard greens, cornbread, black-eyed peas…”
영어권에서 ‘소울푸드’란 미국 남부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즐겨온 음식을 뜻한다. 단순한 식사를 넘어, 고난과 연대, 공동체의 기억이 담긴 문화적 상징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단어가 좀 더 확장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음식, 특별한 기억과 감정이 깃든 음식 — 다시 말해, 영혼에 새겨진 음식. 그것이 한국적 맥락의 소울푸드다.
장인어른은 2016년, 내가 미국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나셨다.
임종을 지키던 손위 처남 형님의 말에 따르면, 그날 곁을 지키던 박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오늘은 아버님이 가장 드시고 싶으신 걸 드시게 하세요.”
장인어른은 망설임 없이 “라면”을 말씀하셨다.
예상대로였다.
가족들은 라면을 정성스럽게 끓여드렸고, 아버님이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맛있게 드셨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형님의 이름을 부르며
“OO야, 나 이제 간다.”
그 한마디를 남기고 평화롭게 세상을 떠나셨다.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소울푸드’란, 영혼만 남기 전에 육신이 마지막으로 떠올리고자 하는 맛이 아닐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음식, 가장 마지막까지 간절했던 음식.
그게 바로 진짜 소울푸드다.
음식은 우리의 기억에 아주 강렬하게 각인된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와 무엇을 먹을지 늘 고민하고,
어릴 적 엄마나 할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을 떠올리며 고향의 맛을 찾는다.
낯선 나라에서도 익숙한 맛을 찾아 수십 마일을 운전하기도 한다.
내 아버지에게 소울푸드는 단연 ‘국수’, 그중에서도 ‘자장면’이다.
아직 정정하시나 당뇨가 있어 조심하셔야 하지만, 아버지는 지금도 자장면을 무척 좋아하신다.
한국에 나갈때면 어머니 눈치를 살피며 몰래 같이 먹으러가곤한다.
한창 경영하시는 회사가 잘 나가고, 직원들이 꽤 많았어도, 종종 구내식당 대신 몰래 혼자 나가 자장면을 드시곤 하셨다
물론 더 오래 장수하시겠으나, 그래도 그날이 나에게도 올 것이라 생각하니 벌써 코끝이 찡하다.
그리고 오늘, 가족이 한국에 있어서 오랜만에 싱글로 보내는 토요일 오후,
문득 내 소울푸드가 떠올랐다 — 제육볶음.
어느 식당 제육이 가장 맛있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시내 마트에서 파는 제육덮밥을 사서 공원에서 조용히 먹었다.
오늘 먹고도 내일 또 생각날 음식.
그리움과 위안이 밴, 지워지지 않는 맛.
그런데 참 이상하지.
어쩌다 한 번 맛본 미슐랭급 음식들보다 왜 라면, 자장면, 제육볶음이 더 떠오를까.
맛은 단순히 혀로 느끼는 것이 아니다.
음식을 기억하는 대뇌피질, 그리고 실제 맛을 감지하는 미각, 후각, 시각,
목 넘김의 촉각과 마지막 포만감까지.
결국, 그 모든 감각을 통합해 기억하는 건 뇌다.
그리고 그 대뇌피질은 나이가 들어도 가장 오래, 또렷하게 남는다.
나이가 들면 미각도, 후각도 둔해지고 시력도 흐려진다.
삼키는 것조차 쉽지 않은 날이 온다. 소화는 더더욱 어렵고.
하지만, 단 한 입의 기억은 끝까지 남는다.
그 마지막 순간, 기억 속 그 맛을 다시 붙잡고,
천천히 육신을 떠나 ‘SOUL’로 넘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향해 가는 시한부 인생이다.
그 마지막 날, 내가 "제육볶음이 먹고 싶다"라고 말하면—
누가 내게 그것을 차려줄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이미 중년, 그리고 노년의 문턱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반백 년밖에 살지 않았는데 이런 고민을 한다는 건 조금 이른 걸까.
하지만, 죽음이란 언젠가 반드시 마주해야 할 것이고,
우리는 언제든 마지막 한입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어떤 SOUL FOOD를 맛보고 싶은가?
미슐랭급의 특별한 요리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닌 듯한 일상의 음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가장 깊이 각인된 맛은 의외로 단출하고 따뜻한 한 그릇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