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by 반시

형수님을 처음 뵌 건 결혼식장이었다. 연휴 중 결혼식이라 전국의 고속도로가 정체되었다. 신랑인 그의 부모 친척들은 결혼식 시간보다 한 시간가량 늦게 도착하였다. 다행히 이후에 다른 결혼식이 없었기 때문에 하객들의 지루한 기다림 말고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결혼식장이 있는 A시로 갈 때는 두세 시간이 걸렸다. 미니버스의 좌석이 매우 불편해서, 사람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느 선배는 이따구 버스를 대절하냐며, 축의금 봉투에 넣었던 5만 원 중에서 2만 원을 뺐다.


그날의 그는 매우 훤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얀 장갑에 턱시도를 입고 환히 웃으며 사람들과 악수를 했다. 우리는 그가 소개팅 어플을 통해 형수님을 만났고 결혼하는 데까지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음을 결혼식장에서조차 흉을 봤다. 어떻게 그가 결혼을 하는지 모두가 의아해했다.


신부는 누구나 그렇듯 새하얬다. 아버님을 따라 입장한 그녀는 그의 옆에 섰고, 둘은 키가 비슷했다. 하지만 그가 더 말랐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체구가 더 커 보였다. 둘은 키스를 했고, 우리는 타고 온 버스를 타고 다시 P시로 돌아갔다.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에 대해서는 말이 많았다. 연구실의 어느 누구와도 깊다고 까지 할만한 관계를 가지진 못했다. 후배 한 명은 석사를 끝으로 학교를 떠났고, 다른 한 명은 우울증을 진단 받았으며, 마지막 한 명은 그를 상대로 반란을 주도했다.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소통이 절실했으나, 강압으로만 후배들을 대했었다. 그리고 그저 후배들이 자신에게 맞춰주길 바랐다. 왜냐하면, 그는 몸이 굉장히 약했기 때문이다.


그의 키는 160 중반 즈음으로 생각되며, 몸무게는 50이 될까 말까 했다. 피곤을 달고 살아서, 오후 4시면 퇴근을 했다. 그마저도 점점 앞당겨졌지만. 병원도 자주 다녔는데 신통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거의 대부분 몸에 이상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딱 한번 이상 소견을 받았을 때, 그는 희한하게도 매우 기뻐했다.


아픈 몸을 이유로 자신의 일을 후배들에게 떠넘겼던 그의 일상은, T가 주도한 오피스 메이트들의 반란으로 인해 급변하기 시작했다. 험실에서 직접 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오피스에서도 예전만큼 마음 편히 있지는 못했다. 으로 당겨지던 퇴근시간이 오후 1시에 가까워졌을 무렵, 다시 퇴근시간이 늦춰졌다. 추측건대 형수님과의 사이가 나빠졌을 거라고 사람들은 수군대었다.


2017년 9월, 그는 휴학계를 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의 생활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돌아간 뒤, 그만을 향하고 있던 사람들의 적대심은 갈 데가 없어졌고, 이윽고 서로를 겨누기 시작했다. 나는 우울증을 핑계로 부산으로 두 달간 요양을 갔다. 나의 소식을 들은 그는 나에게 전화를 해주었다.


나는 학교에 돌아와 전에 없이 열심히 하였으며, 논문으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교수님은 지난주에 나더러 그에게 연락을 해보라 하셨고, 나는 그것을 차일피일 미뤘다. 논문을 대강 마무리 짓고 룸메이트와 회에 소주를 마시면서 '언제 전화하지' 하는 말을 나눴다. 룸메이트는 그와 인사도 하지 않을 정도의 사이였다. 갑자기 몇 통의 카톡과, 전화와, 밴드 공지글로 폰이 요란했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섯 시간 후 몇몇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으나, 대부분 자살일 거라 속으로 생각을 했다.


결혼식 때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다. 누구도 그에게 큰 관심은 없었기에, 아무도 예상은 못했다. 두 번째로 뵌 형수님은 처참하게 말랐고, 영혼 없는 표정에, 빨간 눈, 검은 상복을 입고 있었다. 아버님은 다리가 부러져도 울지 않으셨다는데, 통곡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상례가 익숙지 않은 우리에게 교회에서 온 늙은 아저씨가 설명을 해주었다.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라는 요상한 말을 하며, 끝에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일회용 용기에 담긴 쌀밥과 시락국 그리고 변변찮은 반찬이 올라왔다. 나는 그의 직속 후배였고, 일을 잘 해내지 못해 갈굼을 많이 먹었으며, 사람들은 그런 나를 동정해 줬다. 주변사람들이 그를 욕할 때면, 좋다구나 하면서 한참을 같이 떠들어댔다. 그와 나의 관계는 연구실에서 하는 농담의 클리셰 중 하나였다. 그를 몰아내는데 있어 나도 중요한 축이었던 사실에 대해 사람들이 제발 아무 말하지 않길 바랐다. 사인에 대해서는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검은 형수님과 그를 닮은 아버님, 리고 그를 닮지 않은 어머님의 통곡소리가 소에서 끊임없이 들려는 와중에 하얀 위생비닐이 덮인 테이블 앉아 제정신으로 있기에는 너무나 힘이 들었다. 아버님은 우리에게 와줘서 너무 고맙다 하고, 그가 얼마나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 했는지 말씀하시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장례식장의 정보를 알리는 모니터에서는 페이지가 순환되며 표시되고 있었고, 나는 종종 그가 턱시도를 입고 웃는 눈과 마주쳤다.


그의 부모님은 교회를 다니셨다고 한다. 교회에서는 여러 무리들 시간차를 두고 방문했고, 한 무리가 빈소로 들어가면 함께 찬송가를 부르며 오랜 시간 머물렀다. 장례식장 특성상 다른 사람들의 빈소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는데, 어느 곳에서는 통곡소리가, 다른 곳에서는 찬송가가, 복도에 앉은 조문객들은 이따금 농담 따먹기를, 카트로 물건을 나르는 직원들은 너무나 사무적인 표정으로 카드 결제 사인을 요구던 광경이 굉장히 해괴했다.


연구실 사람들은 대부분 그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던지라, 그와 마지막으로 연락을 한 게 언젠지 서로 물어보았다. 두세 달 전 연락했던 나는 양호한 편이었다. 문제는 사흘 전 그의 전화를 받은 D 형이다. D도 몸이 나빠져 휴학을 한 상황이었지만, 증상과 그에 대한 처방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매우 분명했다. 그는 사람들과 관계가 꽤 좋은 편이었고, 반란이 진행 중이었을 때는 중재를 하려고 노력을 했다. 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훤히 알고 있는 유일한 중립자였다.


그런 D가 옆에서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인 채 눈물을 힘겹게 삼키고 있었고, 나도 그를 오랜만에 보는 것이라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점점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죄책감은 이미 느끼고 있었지만은, 그가 그간의 내 행동들을 근거로 '너는 죄책감을 가져야 해'고 말함으로써 내가 나쁜 놈인 게 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또 다른 문제였다.


우선 나는 반란을 공모했던 T에게 그런 내 잘못과 그에 따른 죄책감을 털어놓으며, 당신은 어떠냐고 물었다. 아직 머릿속이 많이 복잡해 보였지만 고맙게도 너는 그런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때 당시에는 같은 편이었어서, 혹은 스스로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런지도 모른다. 역겨운 행동이지만, 그의 말을 그냥 믿기로 했고, D 옆에 가서 앉았다. 쳐다보고 말을 걸 깜냥은 아직 없었다.


다행히 D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넌 괜찮냐고. 그 무렵 장례식장에 온 연구실 사람들이 속속 늘어나기 시작했다. 잠시 이야기를 하러 나가자고 했다. 그는 내가 죄책감을 가질까 봐 걱정된다고 말해주었다. 대신 자기가 가진 죄책감에 대해서 나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삼일 전 온 전화를 받고 D는 그에게 모질게 했다고 한다. 졸업하고 싶음 빨리 정신 차리라고.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던 자신게 너무나도 죄책감이 든다고 했다. 나는 그를 위로해 주었고, 마음을 편히 가지시라고 했다.


교수님도 사모님과 함께 빈소에 도착했다. 어색한 위생비닐 위로 말을 꺼내는 건 교수님의 몫이었고, 대화가 끝나면 긴 침묵이 이어지길 반복했다. 그 와중에도 교수님은 과제 진행상황에 대해서, 제출할 학회 논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다. 학생들도 언제까지 장례식장에 머물 것이며 언제 무엇을 타고 돌아갈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통곡소리는 여전히 들려왔고, 나는 복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만 때웠다.


밤샐 인원이 다섯으로 정해졌고, 숙소를 잡았다. 두 조로 나누어 세명은 저녁 9시부터 새벽 3시까지(밤타임), 두 명은 그 이후(새벽타임)로 계속 있기로 합의를 봤다. 숙소는 어느 모텔이었는데, 맥주 두 잔과 프링글스를 단돈 삼천 원에 판매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밤타임이었지만 너무 배가 고파서 새벽타임 사람들과 맥주, 프링글스, 치킨을 먹었다. 다들 기분이 괜찮아 보였다. 맥주를 마시며 잔을 부딪힐 때, 나도 모르게 그를 위하여라고 해버렸고, 3초간 정적이 흘렀다.


처음으로 그에 대해서 긴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느 정도 털어낸 다음엔 다시 쓰잘데 없는 잡담 했다. 그리곤 다 같이 밤타임으로 들어가기로 맘대로 정해버렸다. 다시 빈소로 갔을 땐, 보기로 했던 K형이 그 사이에 왔다가 돌아갔다고 했다. 술에 취한 그의 친척 어른들은 간헐적으로 고함을 치 몸싸움을 해서 말리러 가기도 했다. 잠을 못 자 힘든 몸을 이끌고 어떻게 어떻게 12시까지 버틴 후, 마지막으로 계좌이체받은 연구실 사람들의 부의금을 하나하나 봉투에 담았다.


전달받은 부의금 목록엔 오류가 하나 있었고, 익명이 두 건 있었다. 나는 그 익명 한 명은 그녀일 거라 생각했다. 아까 전에 그녀의 남친에게 가서 죄책감이 들지 않냐고 말을 꺼냈다. 대답은 하지 않고,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한 때는 같은 편으로 친하게 지냈었다. 나보고 이제는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선배가 준 돈으로 설렁탕 같은 걸 사 먹고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에는 사람이 거의 오지 않았다. 아버님께 내가 직속후배였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좋은 이야기를 해드렸다. 관을 옮길 사람이 필요했고, 우리 쪽에선 나를 포함한 세 명이 나갔다. 어느 정도 감정이 라앉은 줄 알았는데, 실제 관을 드는 느낌은 정말 이상했다. 그의 모습이 자꾸 상상이 가고 정말 이제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피상적으로 다가왔. 뭔가 울렁거렸다. 를 몰아내던 때가 떠올랐고, 속도에 맞춰 천천히 관을 옮기 있는 내가 타인 같았다.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모두 소리 내어 울었다.


버스를 타고 화장하는 곳으로 이동을 했다. 찬양이 뭉쳐야 제대로 된다면서 교회 아주머니들은 버스 왼편에 주루룩 앉아 빈소에서 들었던 찬송가를 반복해 불렀다. 검색해 보니 '나 가난 복지 귀한 성에'라는 곡이었고, 눈물을 참으며 한글과 영어 가사들을 읽어보았다.


화장하는 곳에는 이미 순번이 꽉 짜여 있었고, 50분쯤 뒤에 관을 옮겼다. 14번 방에서 화장하는 것을 지켜보는데 옆에 다른 무리의 더 큰 통곡소리에 들 시선이 잠시 미묘하게 왔다 갔다 했다. 다시 한 시간쯤 대기를 하였다. 모니터에 냉각 중이라는 단어와 남은 시간이 표시되었고 나도 돛대를 피우고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어냈다.


유족들은 가족 납골당으로 가고 우리도 떠날 채비를 하였다. 그때 아버님께서 오시더니 너무 고맙다고 우리나라의 미래를 어깨에 짊어질 사람들인데 내 아들도 그럴 거라 믿었는데 졸업은 따논 당상인 줄 알았는데, 그리고 또다시 너무 고맙다는 말을 반복하셨다. 미리 봉투에 넣어둔 돈을 주시는데, T형이 갑자기 마음에 동요가 생긴 듯했다. 위로하려 다가갔지만 혼자 있고 싶은 모양이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면서 이천쌀밥정식을 먹었다. 다들 고생했다고 말하고 헤어졌다. 방엔 그와 인사도 나누지 않던 사이인 룸메이트가 있다. T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는 나도 모르겠다. 옛날에 어떠한 행동을 했던 이유는 이제 사라져 버렸다. 해명의 의미도 없다. 여전히 그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게 된다.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