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렸을 때, 학교에서 교과서와 함께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을 이수한다. 여기서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의 대전제는 소위 누구든지 열심히 하면 적절한 성취를 얻을 수 있음을 포함한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너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럼에도 이 교육과정을 이수하는데 문제 없어."
"너도 할 수 있어. (야나두?)"
사람의 심리상, 보편성 뒤에 머무는 것은 꽤 심리적 안정을 제공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선택을 나도 하고 있다는 일종의 군중 심리이다. 그와 동시에 사람은 자신의 특별함에 대한 자각과 표현을 원한다. 요 두 가지는 자칫 모순된 상황에 빠지기 쉬운데,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만나 어떤 선택을 하고 결과에 반응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를 통해 자신만의 특질과 bias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의 경우, 내 자신의 특별함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무언가 탁월하고자 했던 나 자신을 발견했던 것 같다. 사람들에게 내 자신이 특별하다고 한들 사람들은 봐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시점인 것 같다.
"개인의 고유성이 주관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어떤 탁월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을 요약하자면, 끝없이 어떤 탁월함을 쫓는 인생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나는 위험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또 이런 생각을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 소위 오지랖도 부리고 또 내 주변 사람을 바꾸려고 했었는지도 모른다.
"왜 저 사람은 탁월하지 않지?"
"누구나 탁월할 수 있는 어떤 방법론이 있을거야."
나의 경우, 어쩌면 어떤 사람에 대한 인격적 존중보다 탁월함에 대한 강요가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이것을 깨닫는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계기는 밤에 드라이브를 하다 친구와 나눈 대화였다. 친구의 말을 요약하여 회상하자면 이런 내용이다.
"개인의 탁월함과 겸손함이 만나 주변 사람에게 너도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반복했을 때, 어쩌면 처음엔 용기를, 그 다음엔 의문을, 그 다음엔 절망을 줄 수도 있다."
나는 불현듯 성경 속에 달란트가 떠올랐다. 누구는 탁월하고 싶어도 탁월할 수 없고 누구는 평범하고 싶어도 평범할 수 없는 이유. 누구나 같은 달란트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달란트는 정형화 되어있지 않고, 자신조차 쉽게 알 수 없으며, 개인의 고유성과 버무려져 있다. 같은 정보, 같은 자원을 가지고 있더라도 어떤 분야에 대해 같은 성취를 할 수없는 것은 실로 당연하다.
이것은 회사 생활에도 쉽게 적용할 수 있는 것 같다. 최근에는 다른 친구와 회사 생활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같이 일하는 기획자는 기획을 잘 못하고, 개발자는 개발을 잘 못한다며 푸념했다. 내가 아는 이 친구는 여러가지의 달란트와 함께 탁월함까지 갖춘 친구이다. 높은 수준의 brain power, 문제를 끝까지 풀어내는 grit, 자기 조직의 scope을 넘어 회사 전체에 도움이 되는 일까지 모두 해내려는 높은 수준의 ownership. 나는 이 친구에게 내가 최근에 느낀 소회를 공유해주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 그니까 캐리하는 자의 책임과 의무감으로 인한 고뇌가 느껴지네."
"자신의 탁월함이 누군가에겐 일반적이지 아닐 수 있음을 인지했을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같은 문제 아닐까?"
이런저런 대화를 마치고 나서, 나는 어떤 의문이 들었다. 아마 한동안은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을 찾아가는 시간이 될 것 같다.
"궁극의 탁월함이란, 증명하는 것을 넘어 덮는 것, 품는 것 그리고 묵묵히 짐 짊어지는 것 같은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