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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나무 Apr 24. 2024

발리에서 비건지향 삶을 살아보았습니다.

실패하더라도 괜찮아

발리로 향하면서 크게 다짐하고 기대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비건지향의 삶'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템페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되면서 비건인들의 주식량으로 거듭나고 있는데, 이 템페가 바로 인도네시아 발효식품이다. 템페(Tempeh)는 콩을 발효시켜 만든 음식으로, 우리나라의 청국장과 비슷하다 보면 되는데 먹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청국장은 주로 찌개로 끓여 먹지만, 템페는 주로 기름에 튀겨 볶음밥, 샐러드 등에 넣어 먹는다. 또 발리는 현지인보다 여행자의 수가 훨씬 많은 지역이다 보니 비건식당도 많아 보였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 그곳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솟았다.


'비건'이란 단어는 마음속 어딘가에 늘 자리 잡고 있었지만, 쉽지 않은 길임을 알기에 지레 겁먹고는 상자 속에 꼭꼭 숨겨 두었다. '닭장 같은 OO'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닭장은 누가 만들었는가를 생각하며, 그래 그만 먹어야지 싶었지만 그러기에 나는 닭고기 요리를 정말 좋아했다. 후라이드치킨, 삼계탕, 닭갈비, 닭볶음탕 등등. 어떤 죄책감을 가지고서도 멈추지 못하는 내가 이따금은 한심하게 느껴졌고, '먹지 않는 삶'을 택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존경심이 불쑥불쑥 찾아왔다.


들키면 안 되는 숙제 같은 단어를 다시 꺼내게 된 것은 스쿠버다이빙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그 전에도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비건데이를 하자는 캠페인을 보고 잠깐 실천을 하기도 했고, 의식적으로 고기를 먹는 횟수를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런데 나의 마음을 강하게 흔드는 장면을 만나게 된 것이다. 필리핀 세부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페스카도르 섬으로 다이빙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작은 섬 깊은 바다에서 다양한 생명을 만났다. 특히 이날 오징어, 랍스터 등을 보았는데, 다이빙을 끝내고 배 위에 올라오자마자 "오늘 맛있는 거 많이 봤다!"며 즐거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나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찝찝해졌다. 이따금 말을 할 수 없는 바다 안에서 돔류로 보이는 커다란 생선을 만나면 손짓으로 '저거 회쳐서 먹으면 맛있다'며 알려주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그런 장면을 만날 때마다 왜 생명은 다른 생명을 먹고 살아가게끔 설계되었을까 고민이 깊어졌고, 이것이 자연의 원리라고 하더라도 즐거움을 위해 과하게 먹는 존재는 인간뿐인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이후 한국에 돌아와 육류를 먹지 않는 페스코 단계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기에 온전한 나의 지향을 내세운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일단 한국의 많은 음식에는 새우젓이 들어갔고, 찌개 하나를 끓여도 멸치로 육수를 내는 일이 허다했다. 또 친구들과 만나려고 치면 식당 정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다.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하는 민족이었던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의 외식 문화에는 고기가 차지하는 비율이 상당했다.


발리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다짐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환경이 달라지니 해 볼 수 있는 것이 많아졌다. 확실히 발리는 비건 음식점이 많았고, 꼭 비건 음식점이 아니더라도 많은 식당에서 비건을 위한 메뉴를 찾을 수 있었다. 어떤 재료를 사용하는지까지 꼼꼼히 표시해 둔 친절한 메뉴판을 만나는 일도 많았다. 비건 메뉴가 없는 식당이라도 계란, 고기 빼고 만들어 줄 수 있냐 물으면 당연히 가능하다며 두부, 템페, 야채로만으로 맛있는 나시고랭(볶음밥)을 만들어 주었다. 제일 좋아했던 것은 나시짬뿌르였는데, 나시는 밥, 짬뿌르는 섞다는 의미로 밥과 반찬을 접시 하나에 담아 먹는 가장 흔한 인도네시아 음식이다. 나시짬뿌르 가게에 가면 반찬이 촥 펼쳐져 있어 원하는 걸 고르는 재미도 있었다. 또 한 번은 발리공항에서 먹을 만한 마땅한 것을 찾지 못해 메뉴판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는데, 직원이 나와서 왜 그러냐 묻더니 나의 사정을 듣고는 주방장님과 의논하여 두부만 들어간 수프를 끓여 주셨다. 이른 아침이라 기름으로 볶은 나시고랭, 미고랭은 그렇지 않아도 구미가 당기지 않았고, 뜨근한 국물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던 찰나였는데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없었다. 다정한 사람들 덕분에 꽤 목표에 근접한 생활을 이어 갈 수 있었다. 물론 현지 음식을 마음껏 맛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기는 했지만.


하지만 돌이켜보면 다양한 현지음식을 맛보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은 매달매달이 다르다. 어느 때는 김치와 라면까지도 비건식품으로 구입해 먹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지만, 어떤 때는 고삐가 풀려 모든 걸 다 먹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나 자신을 탓하기보다는 실패하더라도 지향을 이어나가는 것에 방점을 찍으려 한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며 고군분투 중인 나 자신을 응원하며 말이다. 종종 길거리를 걸으며 식당 간판을 볼 때, 꾸따 비치 옆 간판도 없는 허름한 간이식당에서 먹었던 베지터블누들을 추억한다. 꼬불꼬불 면과 초록빛 채소를 볶아 만든 아주 간단한 요리였지만 약간 짧쪼름하니 맛이 좋았다. 다 먹고 얼마냐 물었더니 “계란 안 먹었지?”하고 묻더니 계란값을 뺀 금액을 알려주었다. 순간, ‘그래, 이게 맞지!’ 싶었다. 비건을 기본으로 하여 추가된 내용물만큼 가격을 지불하는 이 시스템을 어디서나 만나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하며 말이다. 어디를 가든 모두가 자신의 지향에 맞게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찾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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