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겹친 자리에서 피어오른 마음
“나 내일 발리 가.”
“엥? 발리를 다시 간다고?”
친구들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는 되물었다.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다시 간다는 말에 발리가 그렇게나 좋았는지 궁금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내 터져 나온 나의 말이 친구들을 더 놀라게 하였는데...
“그게... 내가 발리에서 누구를 만났는데 말이지...”
누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누구는 올해 들은 이야기 중 제일 재미난 이야기라며 웃어 보였다. 나도 웃긴데 너희들은 오죽하겠니. 이 정도면 무성애자가 아닐까 생각하며 살아온 지 오래다. 어린 날의 연애 경험이 있기는 하나 지나간 엑스(EX)들을 딱히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외로워서 연애하고 싶다는 친구의 말에 '인생은 원래 외로운 것'이라는 진리를 설파하던 나는 기본적으로 '연애하고 싶다'는 그 감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남자 때문에, 그것도 여행지에서 잠깐 스친 누군가가 보고 싶어 다시 비행기를 타다니... 새로 태어나야지만 가능할 것 같은 일이 갑자기 내 인생에 나타났다. 잘 익은 과일이 '툭'하고 떨어지듯 말이다.
Gede와는 렘푸양 사원에서 만났다. 그는 발리의 풍경을 사랑하는 여행가이드로 나이가 지긋한 서양 할머니 두 분을 모시고 왔다. 그들은 내 양 옆에 나누어 앉았고, 자연스레 대화가 오고 갔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얼마나 여행 중인지, 다음은 어디로 이동하지는 등. 나는 우붓(Ubud)에서 지내는 중이었고, 며칠 후 마지막 여행지인 아메드(Amed)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놀랍게도 Gede는 아메드 출신의 청년이었고, 마을에 행사가 있어 나와 같은 날짜에 고향에 갈 예정이라 했다. 그는 자연스레 마을 행사에 나를 초대했고, 발리를 더 잘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기에 연락처를 교환하고는 3일 후 아메드에서 재회를 했다.
우리는 3일을 함께 보냈다. 그의 생일 축하를 위해 집에 놀러 가 가족들과 인사를 나눴고, 그를 따라 새벽부터 마을행사에 참여했고, 그의 등의 바짝 붙어 드라이브를 즐겼고, 매일 저녁을 같이 먹으며 급속히 가까워졌다. 친밀의 속도만큼이나 이별의 시간도 빠르게 다가왔다. 공항에서 마지막 영상통화를 나누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지만 마음은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싱가포르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루도 빠짐없이 연락을 주고받으며 자라난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집에 돌아온 다음날 발리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을 구입했고, 3주 후 덴파사르 공항 앞에서 재회를 했다.
비행기로 7시간이나 떨어진 거리를 극복하고 우리는 장거리 연애를 시작해 보기로 했다. 시차가 1시간밖에 나지 않는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 흔한 데이트 한 번 하지 못하고, 그저 영상통화로 각자의 일상을 떠들고, 굿모닝/굿나잇 인사를 나눌 뿐이지만 아직까지 잘 지내는 중이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무럭무럭 자라나는 마음이 신기할 정도로.
언젠가 그에게 사실 마지막 여행지는 아메드가 아니라 짱구였는데, 그곳이 너무 재미가 없을 것 같아 막판에 바꾼 것이라 했더니, 만약 그랬다면 조심히 돌아가라는 인사로 끝이었을 거라고 했다. 그러고는 렘푸양 사원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홀로 온 사람 같아서 말을 걸 수 있었던 거라고 덧붙였다. 다른 가이드의 손님에게 말을 거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잘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평소 사진도 잘 찍지 않고, 사람 많은 여행지는 더더욱 잘 가지 않는 내가 렘푸양 사원에 간 것부터가 신의 한 수였다.
우연이 만들어 준 기회 덕분에 우리는 서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연애의 끝맺음이 어떤 이야기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토록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그리하여 오늘도 우리는 미래를 긍정하며 하루의 시간을 더 쌓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