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00년경부터 200년경까지 중국대륙은 우후죽순처럼 제후국이 멸실을 거듭했다. 그 혼란의 시기, 패권을 쥐려는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나 재물이 아니라 책략가였다. 그 책략의 사술을 집대성한 책이 ‘전국책(戰國策)'이다. 전국책 ‘연책(燕策)'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산둥반도 쪽에 자리한 제(齊)나라와 싸우던 연(燕)에 흉년이 들었다.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조(趙)의 혜왕(惠王)이 기회가 왔다고 무릎을 쳤다. 위기를 감지한 연의 소왕(昭王)은 책사 소대(蘇代)를 보내 혜왕을 설득한다. “왕이시여, 귀국에 들어오는 길에 강변을 바라보니 조개가 햇볕을 쬐고 있었지요. 갑자기 날아든 도요새가 부리로 조갯살을 쪼는 순간, 놀란 조개는 입을 모질게 닫고 도요의 부리를 놓아주지 않더군요. 도요는 ‘너는 말라 죽을 것이다'라고 하고 조개는 ‘너는 굶어죽을 것이다' 맞서는데 지나가던 어부가 잡아채 가더군요. 왕이시여. 지금 연나라가 조개라면 조는 도요새입니다. 두 나라가 싸우면 가장 센 쪽이 어부가 되어 맛있는 국물로 성찬을 벌일 게 뻔합니다.” 소대의 말에 조나라 혜왕은 아차 싶어 군사를 거뒀다. 바로 방휼지세(蚌鷸之勢)다.
2차 준석의 난을 풀어헤친 주역은 김기현 원내대표다. 1차 준석의 난은 내상보다 시너지가 컸지만 2차는 방휼지세의 결말이 예견됐다. 김 대표가 파국 직전, 윤석열 후보와 나눈 대화는 회고록을 쓸 때쯤 드러나겠지만 어쩌면 그는 방휼지세를 머리에 그렸을 지도 모른다.
혹자는 국민의 힘에서 벌어진 최근의 자중지란을 두고 안철수가 어부지리를 얻었다고 풀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어부지리는 도요새와 조개를 쥐어틀고 가마솥에 푹 고아야 얻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마침 그 자리에 우연처럼 어부가 지나간 것이 아니라 다툼을 예견하고 그 지점을 주시한 어부의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어부는 얼큰한 국물 맛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쯤에서 요 며칠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안철수 현상을 풀어보자. 안철수가 누군가. 10여년 전 정치판에 들어와 색깔과 빛깔은 퇴색과 변색을 반복했지만 대한민국 정치사에 ‘새 정치'라는 세글자를 흔들며 기린아로 불렸던 주인공 아닌가.
박원순에게 하사하듯 서울시장 후보를 몰아주고 2012년에는 ‘문철수'라는 비아냥도 감수한 양보의 달인이 바로 그다. 구태와 갑질, 비리와 편 가르기에 질린 우리 정치사에 ‘백신'과 ‘안철수'는 이음동의어로 통하며 영호남과 세대를 넘어 온 나라가 철수를 외쳤다. 그런 그가 세번째 대선판에 이름을 올리자 온갖 억척이 난무하고 있다. 존재감 없는 정당을 재건하려는 몸부림, 대통령병에 여전히 백신을 찾지 못한 출마중독, 여야의 틈새에서 때를 기다리다 몸값을 올리려는 고도의 전략가 등등이 그런류의 평이다.
실제로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상황이다. 2차 준석의 난을 지켜본 민심은 대선을 50여일 앞두고 판세를 흔들어 버렸다. 그러자 안철수의 검게 변한 눈썹이 흑호로 돌변했다. 한국기자협회가 안철수를 불러 속내를 물었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후보 단일화 가능성 있나”라는 물음에 안철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관심이 없다”고 툭 던졌다. 그러면서 “저는 제가 대통령이 되고, 정권교체를 하겠다고 나온 것”이라고 말뚝을 쳤다.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안철수의 일관된 메시지는 깨끗한 정치다. 진영논리에 얽매이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 썩은 정치가 국민을 힘들게 한다. 새 정치로 나라를 바꿔야 한다. 10년을 넘게 들었으니 안철수의 입이 열리기 전에 기자들은 워딩을 미리 적을 정도다. 가는 곳마다 도덕교과서와 윤리교과서를 이야기를 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어눌한 목소리로 감성을 건드리려고 온기를 전한다. 물론 안철수의 10년 내공을 폄훼할 의도는 없다. 다만 썩은 정치를 도려내고 새정치를 심겠다는 10년의 외침 뒤에 지금쯤 보여줘야 할 부패하고 병든 정치의 치료제는 여전히 제조 중이다. 기득권 정치의 혁파를 이야기 하지만 무엇이 변화이고 혁신인지는 뒤로 감춘다. 기득권을 내려놓으라면서 말만 던져놓고 눈만 끔벅인다. 궁금해 미칠 것 같은 사람들이 정색하고 방법을 물으면 어색한 미소로 그건 국민들에게 물어보란다. 그 연속극 같은 대사는 이번 대선판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 중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안철수의 속내는 지금 복잡하다. 15%를 돌파하고 20%가 목전이라며 이런 추세면 3자구도는 설 대목에 굳어져 대보름 달이 뜰 때쯤 자신의 얼굴이 달덩이로 변했을 거라는 그림을 그리지만 아뿔싸, 도로 5%로 줄행랑칠 수도 있다는 정치평론가들의 빨간 입이 자꾸 연상되는 것도 사실이다. 핵심은 안철수 스스로의 경쟁력이다. 존재감 없는 정치인으로 살다 선거철만 되면 넥타이를 졸라매는 행태는 선거를 위한, 선거에 의한, 선거용 정치인의 태생적 한계다. 단일화는 관심 없다는 그 워딩이 단일화 이야기는 먼저하면 손해라는 익숙한 문법으로 들리는 이유다. 그런 현상들 때문인지 최근의 안철수 현상은 새롭지 않다. 한편으론 10년 전 흔든 깃발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착각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 같아 참 쓸쓸해 보이는 상승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