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자 P의 무계획 여행 - 프롤로그
요즘은 좀 시들해졌지만, MBTI검사가 유행한 이후로 사람들은 흔히 상대방의 성향을 묻고 정의하며 스몰톡을 나눈다. 외향적이면 E, 내향적이면 I, 계획적이면 J, 즉흥적이면 P.
여행을 떠나기로 하면 엑셀 프로그램부터 켜는 사람들을 J라고 한다. 이동수단, 숙소, 소요 시간, 비용, 시간대별 활동 계획까지 낱낱이 정리하여 그대로 행하는 그 친구들의 통솔만 제대로 따르면 한정된 시간과 비용으로 가장 알차고 가성비 있는 여행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구닥다리 혈액형별 성격론에 이어 MBTI 검사가 한반도를 휩쓴 이래로, 나는 P가 아닌 적이 없었다. 계획이라곤 할 줄 모르는.
아무렴 어떤가. 혼자 갈 건데. 그 지역의 맛집이 어디고 명소가 어디인지 꼭 몰라도 되고, 못 가 봐도 된다. 나는 그 점에 대해 나를 원망하지 않을 거니까. 나는 많이 지쳐 있었고, 그냥 한국을 잠시라도 떠나고 싶었다. 가능한 한 빨리, 아무 생각 없이.
※주의 : 계획형 독자가 이 글을 정독할 시 두통, 현기증, 혈압 상승, 기타 증상이 발현할 수 있습니다.
왕복 비행기 티켓만 사 두고 출국 3일 전까지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여행을 떠날 거라고 말하면 다들 어디어디 갈 거냐고 묻는다. 그러면 대답은 항상 똑같다. 아직 몰라요.
일단 파리에 내리긴 하겠지만 거기 머물 건 아니다. 나는 파리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전에 개인적 사유로 프랑스에 머물던 시절, 관광은 아니었지만 수차례 파리에 간 적이 있는데 좋은 기억이 거의 없어서다. 그런 식으로 잠시라도 들렀던 적 있는 지역은 가급적 제외하기로 하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에 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때마침 텔레비전에서 연예인들이 프랑스 남부 여행을 하며 그 쪽 도시들이 조명을 받는 때였다.
좋아, 남쪽으로 향한다. 니스, 마르세유, 아비뇽은 가 봤으니 어디를 갈까. 툴루즈? 보르도? 우선 도착하는 시간이 저녁때인데, 그 때 이동할 수 있는 도시를 찾았다. 샤를 드골 공항에서 리옹까지 바로 연결되는 기차가 있었다. 일단 리옹에 가서 그 다음을 생각하자.
여기까지가 이 여행에서 사전 계획이 있었던 유일한 부분이다. 이심(E-SIM)은 인터넷으로 구매하고, 환전을 얼마나 해갈까 고민했다. 갖고 있는 체크카드가 해외에서도 사용은 되지만 수수료가 좀 붙을 테니까. 그 얘길 했더니 친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트래블 체크카드 없어? 그게 뭔데.
나를 보는 친구의 눈빛이 애잔해졌다. 그걸 써야 수수료가 없는데 결제건마다 수수료를 낼 생각을 하다니, 너 제법 용감하구나? 아니, 그냥 무식했을 뿐이다. 관광으로는 처음 가 보는 걸 이렇게 표를 냈다. 이 대화를 나누는 시점은 일요일이고, 나의 출국은 화요일이었다. 그러면 월요일에 하루가 남는다는 말이다.
정보는 부족했지만 운은 좋은지, 나는 당일 발급되는 해외여행용 체크카드를 찾아냈다. 월요일이 되자마자 은행에 가서 그 카드를 발급받고, 집에 와서 캐리어에 옷가지를 챙겼다. 여름이라 옷 부피가 크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제 정말로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