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여행

1. 출발

by 바니윤

여행을 가겠다고 하면 언제? 어디로? 다음에 따라오는 질문이 있다.


"누구랑?"


혼자 하는 여행의 재미는 아는 사람만 안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내게 신경쓰지 않는 곳에서, 아무 사회적 책무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오로지 나를 둘러싼 낯선 환경과 그 안에 있는 나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여기서 재미를 더하기 위해 아무런 사전조사도, 계획도 예약도 없이 떠나면 좋다.



<비행기 안에서 쓴 글>


대문자 P의 여행은 비행기 티켓과 첫날의 행선지(도시) 이외에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첫날 밤 어디에서 묵을 것인지 비행기를 타고 고비 사막 상공을 날아가는 지금까지도 모른다. 이런 내가 가장 J처럼 구는 순간은 기내식 냄새가 풍기기 시작할 때. 맹렬히 고민해야 한다.

이 비행기를 타고 거의 한 시간 정도 이륙하지 못할 때는 아 그렇지, 이게 바로 불란서 놈들이지 싶어 새삼 화가 났는데 닭요리랑 맞게 레드 와인을 주문할 수 있게 되자 분노가 눈 녹듯 사라진다. 에어프랑스는 음료를 먼저 주고, 메인 디시를 준 다음 마지막으로 커피나 차를 준다. 홍차에 야무지게 레몬 한 조각을 요청해서 넣어 마셨다.

비행기는 타기 전에도 탑승이 1시간 미뤄졌는데, 타고 나서도 20분이나 앉아 있어야 했다. 웬만한 상황에는 조바심을 느끼지 않는 나지만, 공항에서 리옹 가는 떼제베를 예약해 뒀기 때문에 혹시 타지 못할까 걱정이 된다. 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도착했다. 기장님은 말 그대로 날았다. 비행기도 과속이 가능한가. 미친 듯이 날아서 원래 도착해야 할 시간에 거의 맞게 파리에 내려 준 기장님, 멋져.

공항에 내리고 리옹으로 오는 기차에서 숙소 예약. 아주 긴 하루다. 태어나 처음으로 호스텔에 묵어 본다. 점찍어 뒀던 여성 전용 호스텔이 두 번의 결제 오류를 거치더니 예약 불가 상태가 되었다. 급히 다른 곳을 찾긴 찾았다. 리옹에 도착한 시각이 밤 열 시가 넘었기 때문에 조금 긴장하며 숙소를 찾아갔다. 동양인 여성이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밤 길을 걸어가면 온갖 인간군상이 다가와 말을 걸기 때문에, 최대한 시선을 주지 않고 빠르게 지나가야 한다. 도착하니 프런트에서 직원이 따뜻하게 맞이해 줬다. 안내받은 방은 혼성 도미토리인데, 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창문 열고 도망쳐야 할 것 같은 백발 할아버지가 헬로, 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그는 독일어로 추정되는 라디오 방송을 잠시 듣더니, 이내 불을 끄고 코를 골았다. 첫 날부터 아주 재미있지.


호스텔에는 의자와 테이블이 많이 놓인 중정이 있어, 방에 짐만 놓고 정원으로 나왔다. 이국의 밤하늘을 보며 의자에 앉아 이 여행에서 유일하게 만날 지인, 보라에게 연락해 봤다. 일정이 어떠한지. 내가 찾아가면 놀아 줄 여유는 있는지. 졸업작품을 하느라 바쁘지만 나를 만나 줄 여유는 있다고 했다. 그러면 만나야지. 다음 날 안시에서 볼 약속을 잡고, 리옹에서 안시 가는 버스를 예약했다. 보라의 숙소는 외부인 출입 금지라 나를 재워 줄 수는 없다. 안시 호텔을 예약했다. 호스텔보다 4배 비싸다. 예전엔 여행이라면 무조건 호텔에 묵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이번에 리옹에서 처음으로 호스텔에 와 보니 제법 괜찮았다. 친절하고 재미있다.


호스텔에 대해 말하자면, 장단점이 명확하게 있다. 단점은 내겐 대부분 감당 가능한 것이다. 낯선 사람과 서로 이층 침대 아래위에 누워서 코 고는 소리를 듣는 것. 나도 같이 코 골면 된다. 너무 피곤해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 낯선 사람이 이성일 수도 있는 것. 방에 단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이 힐끔거리거나 연락처를 얻어내려 하지 않는다. 서로 꽤나 관심이 없어서 괜찮다. 공용 화장실과 샤워실. 칸칸이 나누어져 있지만 어쨌든 이 부분은 조금 불편하다. 특히 좁은 샤워 부스 안에서 꾸역꾸역 옷을 벗었다가 입어야 하는 것이. 하지만 못 할 일도 아니다. 뭐 얼마나 대단한 목욕을 하겠다고. 수건이 유료인 건 조금 충격적이었다. 난 아무것도 몰랐다. 수건을 사는 것도 아니고 한 번 빌려 쓰는 데 3.5유로나 든다니. 미리 사 갖고 갈 걸 그랬다. 개인 사물함이 주어지지만 거기 채울 자물쇠는 알아서 준비해야 한다는 것도 놀라웠다. 모르면 돈 내야지.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상쇄할 만큼 호스텔은 싸다. 꼭 필요한 부분을 어떻게든 충족한다. 잠자고 먹고 씻을 수 있다. 뭘 더 바라겠는가.


호스텔 안마당에 있는 테이블에서 이 글을 쓰면서 모든 것이 낯선 느낌을 음미했다. 중정이 있는 건물 구조, 파리에서 리옹으로 내려오는 기차에서 창 밖으로 본 들판과 농가의 형태, 풀 뜯는 흰 소들의 생김새, 밤 아홉 시가 넘었는데도 해가 다 지지 않는 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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