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마지막 날 : 파리
공항이 파리 근교에 있는 이상, 마지막 날은 별수 없이 파리에 있어야 한다. 지인들에게 돌릴 기념품과 선물을 사고, 센 강변을 하염없이 걸었다. 2019년에 불탄 파리 노트르담은 여전히 재건 공사중이었다. 파리 올림픽이 코 앞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센 강의 수질이 수영해도 괜찮을 정도로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마크롱 대통령과 파리 시장이 함께 수영을 할 거라는 기사를 봤다. 이 소식을 들은 파리 시민들은 상류에 변기를 설치하고, 언제 똥을 눠야 마크롱이 수영하는 날 해당 지점에 도착하는지 계산까지 해 준다고. 과연 왕의 목을 자른 나라답게 대통령 취급이 굉장하다.
춥다가 덥다가 비가 오다가 햇볕이 나기를 하루에도 수 차례 반복했다. 이런 걸로 날 괴롭히려 하다니 날씨 녀석. 어림도 없지. 겉옷을 입었다가 벗었다가, 우산을 폈다가 접었다가 하면서 남들 다 간다는 마레지구와 몽쥬 약국에 갔다. 놀라울 정도로 한국 사람이 많았다. 단체 관광객을 응대하는 한국인 직원도 보였다. 나는 불어를 어설프게 할 줄 아는 죄로 프랑스 인 직원에게 붙들려 이것도 사고 저것도 샀다. 아니, 자꾸만 향긋한 걸 발라 주면서 친절하게 설명을 하잖아. 그렇다, 내가 이 약국의 호구였다. 요즘 웬만한 화장품은 한국 제품이 훨씬 좋고, 심지어 싸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크림과 향수를 샀다. 우리 엄마한테 그래도 프랑스 화장품이라고 뭘 내밀고 싶었으니까.
계산대에는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맨 뒤에 서서, 인터넷을 뒤져 미리 준비한 할인 코드까지 핸드폰 화면에 준비해 두었다. 줄 끝에는 말 잘 통할 것 같은 한국인 직원이 계산대에 서 있었다. 그런데 웬걸. 내 차례 바로 앞에서 한국인 직원은 퇴근한다며 다른 직원과 교대했다. 문제는 새로 자리 잡은 프랑스 직원이 내 여권에서 옛날에 어학연수를 위해 받았던 학생 비자를 찾아낸 것이다. 당신, 이 비자로 들어왔으면 택스 리펀 안 돼요. 나는 더듬더듬 설명했다. 이건 몇 년 전에 만료된 비자다. 지금 나는 관광객이다. 내일 서울로 돌아간다.
몇 번을 말해도 들은 체도 안 하며 그녀는 비자가 붙은 내 여권 페이지만 팔랑거렸다. 아니, 눈이 있어서 비자를 찾았으면 거기 써 있는 숫자도 좀 보시라고요. 답답해 숨 넘어가기 직전, 다행히 아직 퇴근하지 않은 한국 직원이 돌아와 무슨 상황이냐고 물었다. 내가 그녀에게, 그녀가 프랑스인 직원에게 설명하니 다행히 알아들었다. 그러느라 내 계산을 할인 코드 없이 해 버렸다. 뒤늦게 돌아서서 나 할인 코드가 있다고 말하니, 취소하고 다시 해 줄 수가 없단다. 올랄라. 다른 손님들 계산해 줄 때는 할인 코드 있는지부터 물어보시더니, 내 차례에만 여권으로 트집 잡고 할인 코드도 안 물어보고. 굳어지는 내 표정을 본 직원이 뭔가를 한 움큼 내밀었다. 여러 종류의 화장품 샘플이었다.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군. 나는 미소를 되찾았다.
다음은 마트다. 시드르, 로제 와인, 귀엽게 생긴 샴푸와 입욕제. 한국에 돌아가 챙길 지인 리스트를 떠올리며 실컷 샀다. 내것보다 남 줄 물건을 고를 때 더 신이 난다. 이상한 일이다. 이제 다 짊어지고 숙소로 가야 했다. 밤 버스에서 예약한 내 숙소는 다음 날 공항으로 가기 편하도록 지하철 접근성에만 초점을 두었다. 도착해 보니 호텔 주변으로 식당과 술집이 쫙 깔렸다. 앰프를 타고 나와 호텔 벽을 울리는 베이스 소리에 일찍 잠들긴 글렀다 싶었다. 마지막 날 사치를 부리고 싶어서 일층 바에 내려가 칵테일을 주문했다. 나 혼자밖에 없었고 카운터 직원이 와서 코스모폴리탄을 만들어 주었다. 지난 한 주 가량 지나 온 일들을 찬찬히 돌이켜 보았다. 행복했다, 역시.
방으로 돌아와 캐리어에 귀국 짐을 차곡차곡 챙겼다. 깨질 만한 건 수건에 둘둘 말아 옷 사이에 넣고, 기내에 갖고 탈 물건을 따로 챙기고, 기상 알람을 맞췄다. 귀국하는 날만큼은 반드시 제 시각에 일어나야 한다. 그렇게 마지막 밤, 피곤한 몸은 금방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비행기를 놓쳤다.
알람은 제 때 듣고 일어났다. 공항에도 일찍 도착했고 수하물도 미리 부쳐 놓고 택스 리펀 서류도 다 제출했다. 출국장까지 나가 기다렸는데, 반갑지 않은 대자연이 찾아온 것이다. 싸르르 아파 오는 아랫배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생리용품 때문에 나는 잠시 정신이 나갔다. 보통은 꼬박꼬박 날짜에 맞게 찾아오는데, 그것만 믿고 준비를 안 해 왔다. 출국장 안에서 약국을 찾고, 생리대를 사고, 화장실에 들렀다 나오니 내 비행기 탑승이 끝났단다. 네? 심지어 안내 방송도 했다는데 나는 듣지 못했다. 아니, 아직 비행기 안 떴는데 못 태워 준다고? 믿기지 않아 두 번, 세 번을 물어도 승무원의 대답은 똑같았다.
세상에. 그럼 저는 어떻게 하면 좋죠? 물어보니 승무원이 나의 갈 길을 안내해 줬다. 왔던 경로가 아닌 입국 심사대로 나가, 상황을 설명하고 재입국 절차를 밟아 다시 공항 창구로 나가란다. 그 다음 비행기 티켓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하하하하. 대자연이 불러 온 대참사에 나는 넋이 나갈 것 같았지만, 사람의 넋은 그 정도 일로 쉽게 육신을 빠져나가지 않는다. 하릴없이 돌아서서 프랑스에 갓 입국해 설레는 외국인들 사이에 줄을 섰다. 재입국 도장을 받고 나와 다시 공항 창구. 인포메이션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어느 정도 충격이 가셨다. 당황스러운 일을 겪는 사람에게는 멍하니 있을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다. 내 앞에 선 미국 사람이 누군가와 통화하며 자기가 ‘에어포얼트 차알~데거울’에 있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현지 발음이 어떻든 절대 샤를르 드골이라고 발음하지 않는 꿋꿋한 사람들이다. 저렇게 말해도 프랑스 사람들이 대충 알아들어 준다. 한국어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지만 영어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저런 권력을 누렸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기다리니 내 차례가 왔다. 직원 앞에 선 나는 정신을 부여잡고 상황을 설명한 뒤, 수십만 원을 더 들여 다음 티켓을 구했다. 그래도 집에 갈 수 있는 게 어디냐. 공항에서 몇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하지만 상관없다. 그나저나 먼저 부친 내 수화물은 어디에 가면 찾을 수 있나요? 수화물 조회는 인포메이션이 아니라 저 쪽 에어프랑스 창구에 물어보란다. 좋아, 나는 이제 시간이 아주 많다.
또 다시 줄을 서 기다린 끝에, 에어프랑스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공항 재입국할 때 한 번, 방금 인포메이션에서 두 번, 에어프랑스 창구에서 세 번째 설명하니 이 기막힌 상황이 점점 객관화되어 보였다. 설명을 반복하며 내면이 점점 차분해졌다. 그러나 어디까지 해야 내 멘탈이 탈출하는지 시험하듯, 나의 짐가방은 위치 조회가 되지 않았다. 직원이 말하길, 보통 탑승자가 안 타면 짐도 다시 내놓고 출발한다는데 이상한 일이랬다. 아무튼 자기네는 모르겠으니 새 비행기 탑승할 때 탑승구 직원들에게 다시 물어보라고. 음. 나는 잔잔히 웃었다. 이제 될 대로 돼라.
시간이 한참이나 남은 공항에서 핸드폰 충전기를 꽂아 두고 웹 소설과 웹툰을 실컷 봤다. 시간 보내는 데 이만한 게 없다. 인터넷 최고. 그러던 차에 보라에게 메시지가 왔다. 오늘이 졸업시험 결과 발표랬지, 참. ‘언니, 나 수석졸업해!’ 아, 오늘 그나마 좋은 소식도 들리네. 아주 나쁜 날은 아니다. ‘축하해!!!!! 그 동안 고생 많았다 정말. 그리고 난 비행기를 놓쳤어^^’ 답장을 보내자마자 전화가 왔다. 언니, 이게 무슨 소리야. 응, 말 그대로 비행기 놓쳤어. 네 번째로 하는 상황 설명에는 이제 짐가방까지 행방불명이라는 이야기가 덧붙었다. 언니 어떡해? 몰라, 그래도 집에는 갈 수 있겠지. 우리는 그저 웃기만 했다. 다시 한 번 보라의 수석 졸업을 축하하며, 한국에서 다시 보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시간이 남아도는 나는 미처 못 한 쇼핑도 더 했다. 면세점에서 향수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가니, 잘생긴 남자 직원이 내 여권을 보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앗, 또야 또.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 이제 놀랍지 않다. 그래도 예의상 놀란 표정으로 물어봐 줬다. 한국말 잘하시네요? 어떻게 배웠어요? 그는 몇 달 전까지 한국에 있었다고 대답하곤 자기가 아는 한국말을 줄줄 했다. ‘안녕하세요, 진짜 맛있다, 귀여워 죽겠어.’ 마지막 문장을 듣고 나는 음흉한 눈으로 되물었다. 누가 그 말을 당신에게 했나요? 친구가요. 음, 여자 친구? 아니요, 남자였고 그냥 친구. 나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그 남자분은 당신과 친구로 남을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는데, 라는 말은 꿀꺽 삼켰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나는 다시 출국장에 섰다. 탑승구 직원들에게 다가가, 다섯 번째로 내 상황을 설명했다. 그래서 내 짐가방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오, 마침내 그들이 찾아냈다. 나는 탈 수 없었던 그 비행기를 내 짐가방이 혼자 타고서 한국에 도착했단다. 몽 디유. 그들은 내게 한국 가서 찾아 보라는 말과 함께, 공항에서 쓸 수 있는 바우처를 건넸다. 이건 항공사의 실책이라서 주는 모양이었다. 그런 것까지 기대하진 않았는데. 연이은 불행 끝에 무척 긍정적인 마인드를 장착한 나는, 신나게 스타벅스로 달려가 샌드위치와 커피를 샀다. 어쨌든 이제 다 해결했다. 나머지는 한국에 가서 생각할 일이다.
돌아오는 비행은 순조로웠고, 인천공항에 덩그러니 놓인 내 짐가방을 찾으며 여행은 막을 내렸다. 보고 싶었어, 내 와인, 내 시드르.
대문자 P의 여행,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