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여행

8. 일곱째날 : 카르카손

by 바니윤

아침에 눈을 뜨니 손에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아뿔싸, 카르카손 행 버스를 예약하려다가 결제를 채 하지 못하고 잠든 것이다. 황급히 새로고침을 해 보니 버스는 이미 매진되었다. 하는 수 없지. P는 계획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계획이 아주 많은 사람이니까 바로 플랜B로 넘어간다. 카르카손 행 기차를 검색하니 다행히 버스 비용과 큰 차이가 없었다. 기차를 예약하고 급히 나갈 준비를 했다. 시간이 촉박했다. 아침부터 짐 가방을 끌고 울퉁불퉁한 포석 위를 뛰다시피 했다.


그 와중에 어디서 자꾸 야옹 소리가 들렸다. 바쁘게 걷다가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는 소리. 고양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시간은 촉박하고, 걸음을 멈추지 않는데도 자꾸만 들리는 소리, 야옹. 옆에서 걷고 있는 남자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는 나처럼 핸드폰으로 지도를 보며 바쁘게 걷고 있었다. 그 남자가 입을 다물고 있는데도 다시 소리가 들렸다. 야옹. 조금 더 걷다 보니 마침내 발견했다. 내 앞에서 걸어가는 아주머니의 접이식 카트, 거기에 실린 상자가 천으로 덮여 있었다.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며 천이 움직이자 그 사이로 신비로운 눈동자가 빛났다. 야옹. 세상에 귀여워라.


바쁜 와중에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다 간신히 기차를 탔다. 기차라기보다 열차라고 불러야 알맞을 TER는 지정 좌석제가 아니어서 하마터면 서서 갈 뻔했다. 다행히 접이식 좌석 하나가 비어서 냉큼 펴고 앉았다. 혹시 몰라 짐가방을 꼭 껴안고 졸다 깨다 했다. 대중교통은 프랑스에서 가장 털리기 좋은 장소다. 앞 자리에 아프리카계 아주머니가 딸 둘을 데리고 앉았다. 큰 아이는 옆자리에 앉혀 핸드폰으로 영상을 보여 주고, 작은아이는 유아차에 눕혀 좌석 옆에 두었다. 유아차 안에서 칭얼거리려던 아이는 나를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신기하게 생겼지? 네가 울지 않아서 다행이다.


오래지 않아 카르카손에 도착했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한 무리의 소년들이 서로 때리고 뛰며 장난치기 바빴다. 그들은 중학생 정도 되어 보였다. 한국으로 치면 '경주'라는 말이 정말인지, 학교에서 단체로 견학 온 것 같았다. 넋이 나간 인솔 선생님을 지나 늘 하던 대로 내니백에 짐가방을 맡기러 갔다. 역 근처는 흔히 그렇듯 건물들이 낡고 조금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행인이 거의 없어서 더 그랬다. 이 도시는 다같이 월요일에 쉬나. 확인할 길은 없다. 시가지를 지나 도시 변두리로 나오니 저 멀리 견고한 중세 성채가 보였다. 약간 먹구름이 낀 하늘 아래 뾰족한 지붕과 성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성을 향해 걷기 시작하니 작은 강이 흘렀다. 다리를 건너 숲을 지나, 식당과 카페가 줄지어 선 거리에 들어섰다. 이 곳에서 배를 채우기로 했다. 메뉴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전날 먹지 못한 까술레. 익힌 콩에 순대 같은 것과 오리 다리를 하나 넣어 주는 이 요리는, 질그릇에 뜨끈하게 담겨 나온다. 원래 그렇게 먹는 건지, 내가 동양인이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식당 사장님이 쌀밥을 권했다. 게다가 필요하면 뿌려 먹으라며 매운 소스도 함께 주셨다. 사장님, 하, 참나. 잘 식지 않는 토기 그릇에 건더기 많은 고깃국이랑 밥 한 공기, 매운 양념을 주다니. 어디서든 국밥을 찾는 한국인의 영혼이 따뜻해졌다.


커피까지 한 잔 주문해 마시고 나와 곧바로 성을 향했다. 평지에서는 몰랐는데, 올라갈수록 바람이 불기 시작해서 조금 추웠다. 한국은 푹푹 찌기 시작하는 계절인데, 이런 점이 새삼 먼 곳에 와 있음을 실감케 했다. 물 없이 말라버린 해자를 지나 성문으로 들어섰다. 외벽과 내벽 사이에 폭이 넓지 않은 길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구조를 보니 언젠가 물이 가득 차 있었을 해자와 안쪽 벽을 따라 순찰을 돌았을 경비병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 길로 지금은 자동차가 다녔다.


가장 바깥쪽 문 안에는 기념품 상점과 식당, 카페,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었다. 일단 초콜릿에 푹 담갔다 나온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맛있어. 맛있어!! 더 안쪽으로 본격적인 내성 건물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입장권을 구입해야 했다. 망설임 없이 티켓을 샀다. 이 성은 볼 가치가 있다. 내부는 5세기 로마, 외성은 13세기 프랑스의 생루이 왕이 세웠다는 카르카손 성에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지금은 프랑스 땅이지만, 먼 옛날 이곳은 사라센 인들이 점령했었다. 당시 기독교국인 프랑크 왕국에서 무슬림인 사라센 땅을 공격하는 일은 흔했다.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사라센 측은 문을 걸어 잠그고 버텼는데, 프랑크의 피핀 3세(버전에 따라 피핀 3세가 아닌 샤를마뉴 대제라고 전해지기도 한다)는 성을 포위하고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사라센 측은 아사 직전까지 몰렸으나, 이 때 성 내부에서 왕비 ‘카르카스’가 지략을 발휘했다. 그녀는 돼지에게 콩을 잔뜩 먹여 성 밖으로 던졌다. 불쌍하게 추락사한 돼지의 배에 콩이 가득찬 것을 보고, 프랑크 왕국 군대는 내부에 식량이 충분하다고 생각해 철수하였다.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성 안의 종을 울렸는데, 그로 인해 이 도시의 이름이 카르카손(카르카스가 종을 울리다)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전설이 정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콩을 잔뜩 먹고 던져진 돼지는 어쩌면 탐욕스러운 전쟁을 반복하는 십자군의 탐욕을 상징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성 내부를 올라갈수록 산바람이 불었다. 높은 곳에서 부는 바람은 차갑고 거셌다. 첨탑과 통로를 누비며 바라본 바깥 멀리에 장벽처럼 피레네 산맥이 보였다. 그 산을 넘으면 스페인이다. 십자군, 사라센 인들, 한니발, 그리고 나폴레옹이 그 산을 넘었다. 박물관과 유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느낌을 알 것이다. 기나긴 시간을 넘어 옛날의 어떤 광경과 사람들, 이야기를 생생하게 느끼는 순간. 언젠가 한 병사가 눈을 부릅뜨고 먼 곳을 내다보았을 첨탑에서 밖을 향해 섰다. 산바람이 머리카락을 실컷 휘저어 놓았다. 새파란 하늘과 눈송이처럼 흰 구름, 시린 바람, 그리고 산맥. 여기서 내가 본 것을 먼 훗날 누군가가 또 보겠지.


이 곳도 랑그독 지역이다보니 불어, 스페인어, 오크어가 섞여 들렸다. 기념품 가게에서 주인이 “꺄란~뜨 유우로.” 하니 손님이 “꽌또?” 하고 되묻는다. 주인은 재차 “꺄란~뜨.”하고 대답했다. 혼자 재미있어하며 비누와 향주머니를 샀다. 이제 여행이 거의 막바지다. 아무리 계획 없는 P의 여행이어도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미리 사 두었다면 일정에 맞게 움직여야 한다. 밤 버스로 파리에 갈 것이고, 이 버스는 환승 대기 없이 한 번에 간다. 심야 환승 대기에 한 번 데였더니 그게 중요해졌다. 이제 파리에서 묵을 곳은 버스 안에서 어떻게든 정하기로 했다. 돌아보니 처음에 어렴풋이 생각했던 보르도, 푸아티에 등등은 죄다 버리고 다른 도시만 실컷 다녔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호수, 산맥, 맑고 찬 공기, 이야기, 상상, 사람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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