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여섯째날 : 툴루즈
일어나서 세수하고 짐을 챙기고 다음 도시로 이동하는 생활이 며칠 사이 익숙해졌다. 유목민이 된 기분이 들었다.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툴루즈로 이동! 내리자마자 하늘이 흐렸다. 몽펠리에와 비슷한 위도인데도 꽤 추워서 겉옷을 꺼내 입었다. 바람이 꽤 부는 날씨였다. 하지만 시작부터 느낌이 좋았다. 버스에서 내리기도 전부터 툴루즈 특유의 붉은 벽돌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지역의 토양이 붉은 황토라서 그렇다고 한다. 이 장밋빛 건물들 덕에 툴루즈는 ‘장미의 도시’로 불리기도 한다.
일요일이라 아침 일찍 시장이 열려 있었다. 나는 길에서 열리는 재래시장을 좋아한다. 슈퍼마켓보다 저렴하기도 하고, 온갖 물건들이 규칙 없이 바닥에, 좌판에, 머리 위에 진열되어 있는 걸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또, 브랜드 제품은 한국에도 웬만하면 들어와 있는 반면에 재래시장 물건들은 현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어서 구경할 만하다. 여기서는 엄마 선물로 옷을 한 벌 샀다.
그러다 보니 배가 고팠다. 재래시장 근처에서 한식당을 발견했는데, 일요일에는 영업하지 않는 곳이었다. 슬슬 한식이 당길 때가 되었는데 아쉬운 일이다. 이 날은 아침에 버스를 타고 오다가 들른 휴게소에서 커피와 크루아상 한 개 먹은 것이 다였다. 슬슬 배를 채워야 했다. 바로 그 때 눈 앞에 익숙한 메뉴가 적힌 간판이 보였다. 아쉽게도 한식은 아니고 라멘집이었다. 오, 점심은 라멘인가. 흐리고 추운 날엔 뜨끈한 국물이지. 문 밖에서 메뉴를 훑어보고 있자니, 안에서 내다보던 직원이 인사를 한다. 봉쥬흐. 좋아, 라멘이다.
나를 데리고 들어온 남자 직원이 자리를 권하고, 안에서 일하던 직원을 불렀다. 그녀는 동양인이었다. 일본 식당이니 일본인일까, 중국 아니면 베트남 사람일까? 그녀가 메뉴판을 가져다 주었다. 라멘과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그녀도 궁금했는지 내게 물었다. “Vous êtes japonaise?”“Non, je suis coréenne.”“아, 한국 분이세요?” 한국 떠나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한국말이 이렇게 반가운지. 라멘을 기다리며 몇 마디를 나누었다. 그녀는 툴루즈에서 공부하려고 입학 준비 중이라고 했다. 이 근처에 가볼 만한 곳이 있나요? 물으니 카르카손이 가깝다고 했다. 안 그래도 아침에 버스를 타고 오다가 저 멀리 보이는 도시가 궁금했다. 지도 어플을 보았더니 카르카손이었지. 거긴 어떤지, 볼 만한지 물으니 역사에 관심이 있으면 볼 만하다고 했다. 프랑스 아이들도 수학여행처럼 단체 관광을 오는, 한국으로 치면 경주 같은 도시라고 한다. 다음 날 보르도를 가 볼까 했던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내일은 카르카손이다.
라멘을 다 먹어 갈 무렵, 뒷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던 프랑스 커플이 먼저 식사를 마쳤다. 남자가 계산하는 동안, 여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저, 혹시 한국 분이세요?” 한국말이었다. 띠용, 어떻게 아셨어요? 아, 우리 대화하는 거 들으셨구나. 그녀도 넷플릭스로 한국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아니, 너무 잘 하시는데요. 놀라워라. 저는 여행 중이에요. 그렇군요, 좋은 여행 되세요. 감사합니다.
손님을 보내고, 나도 식사를 마쳤다. 일어나며 한국 직원분께 인사를 건넸다. “하시는 거 잘 되시길 바랄게요.”“감사합니다. 언니도요!” 언니라니. 이 사람, 붙임성이 있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배가 든든해지니 다시 기운이 생겨, 자코뱅 수도원과 생세르낭 대성당을 보러 갔다. 수도원에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묻혀 있다고 한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나 들어 본 인물이 묻혀 있다니 기분이 묘했다. 학창시절의 수업 내용이 가물가물한 사람들도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고 말하면 어렴풋이 기억이 날 것이다. 스콜라 철학의 대가이자 당대 최고의 신학자였던 만큼, 그의 시신도 사후 여러 토막이 나 곳곳에서 몰려 온 사람들이 나누어 가졌다고 들었다. 이 곳에 묻혀 있는 유해는 온전한 것일까. 현대인의 관점으로는 꽤나 기괴하지만, 13세기에는 유명한 성인의 몸을 최대한 여러 조각으로 잘라 성당의 성유물로 모시는 것이 당연했다고 한다. 위대한 성인의 잘린 몸 조각이 도시의 안전과 번영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다른 도시의 성당들과 다른 외양이 눈에 띄었다. 반원 아치, 두꺼운 벽, 간결하고 기품 있는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건축 양식. 한국에서는 전주 여행을 할 때 본 전동성당이 비슷한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이 곳은 산티아고 순례길로 가는 코스 중 하나로, 여러 성인의 유해와 조각상이 모셔져 있어 순례자들이 많이 방문한다고 한다.
날이 꽤 쌀쌀하고 해도 지고 있어, 숙소로 가 체크인을 했다. 6인실 도미토리에 아직 나밖에 들어와 있지 않아, 짐을 내려놓고 잠시 창문을 열었다. 담쟁이가 타고 오르는 붉은 벽돌 건물, 나무로 된 덧창. 삼층에서 나는 창문을 열고, 창틀에 걸린 화분과 거리를 지나는 행인과 맞은편 집의 창문들을 내다보았다. 이 거리에 사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두근거렸다.
가지고 온 옷을 한 번쯤 빨아야 할 때가 왔다. 빨랫감을 들고 밖에 나가, 코인 빨래방 세탁기에 전부 넣었다. 건조까지 마친 옷들을 차곡차곡 접어 가방에 넣으니 마음이 든든했다. 보송보송 깨끗한 속옷과 양말, 티셔츠가 남은 여행을 쾌적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제는 저녁 식사를 할 시간.
원래는 까술레를 먹고 싶었다. 툴루즈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고향이다. 소설 ‘제3인류’에서 등장인물들이 까술레를 먹는 장면이 있었고, 나는 이름도 생소한 그 음식이 무슨 맛인지 꼭 알고 싶었다. 그러나 툴루즈에서 내가 점찍어 놓은 까술레 식당은 빨래를 하는 사이에 영업 시간이 끝나버렸다. 그래서 대충 눈에 보이는 다른 가게에 들어갔다. 크레프 가게였다. 프로방스 식 크레프와 작은 샐러드, 그리고 시드르를 주문해 놓고 기다렸다. 가만 보니 손님은 많고 직원들이 무척 바빴다. 맛집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벽에 콘센트까지. 다 죽어 가는 핸드폰을 충전해 놓고 크레프를 먹기 시작했다. 가지, 토마토, 양파, 기타등등이 들어 있는 천상의 맛. 이 크레프 때문에 시드르를 한 잔 더 주문했다. 크레프, 디저트, 차를 주로 파는 가게인데 노래는 계속 하드 록만 나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이름도 안 보고 들어온 이 가게의 이름을 따로 기록해 두었다. 르 셰르파.
만족스러운 식사 후 숙소에 돌아가 간신히 샤워를 하고 기절했다. 매일 어떻게 잠드는지도 모르게 잠이 드는 여행. 한국에서는 날이 밝도록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곤 했는데. 불면증, 하루 2만 보씩 걸으면 완치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