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여행

6. 다섯째날 : 몽펠리에

by 바니윤

버스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뜨니 날이 밝고 있었다. 아직 행인도 많지 않은 이른 아침에 몽펠리에 땅을 밟았다. 내가 묵기로 한 호스텔은 아직 입실 시각이 되지 않았다. 잠깐 앉아 시간을 보내기에는 맥도날드만한 곳이 없다. 역 앞 맥도날드에 들어가 맥모닝과 커피를 주문했다. 배를 채우고 좀 앉아 있자니 화장실을 쓰고 싶은데, 짐 가방이 걱정됐다. 한국에서는 신경도 쓰지 않을 일이지만, 프랑스에서는 물건만 놔두고 자리를 뜬다는 걸 상상할 수 없다. 전에 프랑스 유학생 커뮤니티에서 누군가 ‘전자제품 버리는 법 아세요? 노트북 어떻게 버려야 해요?’ 라고 질문하자 ‘카페에 가서 테이블에 노트북을 두고 화장실에 다녀오세요.’라고 댓글이 달렸다.


어쩔까 고민하다 보니 앞자리에 한 여성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앉았다. 아이에게 빵을 먹이며 앉아 있으니, 곧 다른 여성이 들어와 말을 건다. 알고 보니 중고 거래 현장이었다. 어린이용 보행기처럼 보이는 물건을 팔고, 판매자는 자리를 떴다. 그래, 이 여자분이다. 나는 아이 엄마에게 내가 화장실에 다녀올 동안 내 짐을 잠시 봐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물론이지.’하고는 큰 소리로 계산대 안쪽 직원을 불러 화장실 문을 열어 달라고 말했다. 아하. 이 지점의 운영정책은 매장 내에서도 화장실 문을 늘 잠가 두는 것이구나. 노숙자와 얌체 이용객을 막기 위한 맥도날드의 노력이 눈물겨웠다. 그보다 날 도와준 아이 엄마의 친절이 더 눈물겹고.


화장실에서 간단히 세수와 양치를 했다. 자리로 돌아와 이 도시에서 가볼 만한 곳을 검색해 보는데, 어린 소년이 혼자서 매장에 들어왔다. 곧바로 나에게 다가와 다짜고짜 돈을 달라고 했다. 외국인 관광객만 노리는 앵벌이다. 뭐라고 대응하기도 전에 앞자리 여성이 내쫓았다. 여러모로 그녀에게 신세를 졌다.


밖으로 나와 일단 숙소로 향했다. 역에서 멀지 않은 호스텔이었다. 가서 체크인 시각은 아직 멀었지만 내 짐을 맡길 수 있는지 물었다. 직원은 지하에 보관함이 있으니 이용하라고 했다. 가 보니 보관함은 있는데 잠금 장치가 따로 없다. 아 이런, 나는 여행 초짜가 틀림없다. 수건도, 자물쇠도 다른 여행객들은 한국에서 다 가지고 올 텐데. 프런트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자물쇠를 샀다. 조금 억울했다. 피의 여행에는 이런 세금이 붙는다.


짐을 두고 홀가분하게 도시 구경을 나섰다. 몽펠리에는 건물들이 비교적 새것 같아 보였다. 방문해 본 다른 도시들에 비해 조경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았다. 몽펠리에의 상징목은 느릅나무라고 한다. 코메디 광장에 심은 느릅나무는 영양을 충분히 공급하기 위해 지하를 크게 파고 흙을 채워넣었으며, 그 아래층은 주차장으로 조성했다는 안내문을 읽으며 광장을 거닐었다. 뜻밖에도 어디선가 한국 노래가 들렸다. 코메디 광장 한가운데서 십대 소녀들이 스피커를 가져다 놓고 K-POP 댄스를 추고 있었다. 몇 년 사이 사뭇 달라진 한국 문화의 위상이 느껴졌다.


유럽에서 낯선 도시에 별다른 계획 없이 갔다면, 우선 광장을 보고 그 다음은 성당을 보면 된다. 몽펠리에 대성당은 분명 고딕 양식인데 모래색 재질과 입구의 둥근 기둥 때문인지 다른 고딕 성당들과 사뭇 느낌이 달랐다. 한때는 유럽 전역에서 똑똑하다는 대학생들이 몰려들고, 무역으로 돈깨나 만졌다는 대도시 몽펠리에는 마르세유에 밀려 영락하였다. 그래서인지 도시 자체가 작고, 가볼 만한 관광지가 적다. 몽펠리에 의대에 다녔다는 노스트라다무스는 이런 미래도 예측했을까?


그러나 모르는 도시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것은 분명 재미있다. 미로 같은 골목 사이로 남의 집 담장과 창문을 구경하며 나는 걸었다. 한 골목에서 이층 창가에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걸 보고 멈췄다. 재빨리 사진을 찍어 확인했다. 귀엽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든 순간 놀랐다. 아니, 고양이가 복사가 된다고? 방금 찍은 고양이와 똑같이 생긴 고양이가 한 마리 더 나와 나를 내려다본다. 귀여움이 두 배. 넋을 놓고 바라보자니 아주머니 한 분이 길을 걸어오다 나를 보고 웃는다. “헤이, 그 집엔 4마리 있어.”


안타깝게도 네 마리 중 얼굴을 보여 준 고양이는 두 마리뿐이었다. 눈으로 실컷 귀여워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 도시에 체류할 시간이 길지 않으니까. 몽펠리에는 수목원이 유명하다고 해서 가 보았다. 입구부터 낯선 풀과 나무, 꽃들이 반긴다.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니 둥치 사이로 여기저기 종이가 꽂힌 큰 나무가 나왔다. 아하. 소원 나무다. 나와 내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 주세요. 흔하지만 쉽지 않은 소원을 적어 넣었다. 평일 낮이어서 그런지 수목원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는 거의 혼자서 커다란 수목원을 거닐었다. 차 소리도,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한낮, 이국의 새 소리를 들으며 모처럼 진짜로 쉬는 기분을 즐겼다. 이런 것이 바로 휴식이고 평화로구나.


달리 갈 곳이 없어, 트람을 타고 종점까지 가 보았다. 여행할 때 간혹 그렇게 해 볼 때가 있다. 운이 좋으면 산이나 계곡 같은 예쁜 풍경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종점에는 그런 행운 대신 조용한 외곽 마을과 흐린 하늘만 있었다. 바다가 가까운 몽펠리에지만, 바다를 보려면 그 종점에서도 다시 버스를 타고 한참 가야 한다고. 실망할 것 없다. 적어도 호기심 충족은 했다. 트람을 오래 타고 있자니, 정거장마다 나오는 안내 방송이 독특했다. 처음에는 스페인어인가 했는데, 알아보니 오크어라고 한다. 세상에, 옛날에 들었던 프랑스어 수업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프랑스어는 크게 오일어와 오크어로 나뉜다. 표준 프랑스어는 오일어에 가깝고 북부 지역에서 주로 사용하며, 남부에서는 오크어를 쓴다. ‘예’라는 말을 북부에서는 오일, 남부에서는 오크라고 해서 그런 명칭이 붙었다. 오크어를 쓰는 지역을 ‘옥시타니’라고 한다. 한국에는 와인 산지로 잘 알려진 ‘랑그독’ 지역은 지역명 자체가 ‘오크어’라는 뜻이며, 더 잘 알려진 화장품 브랜드 ‘록시땅’은 사실 표기를 잘 살펴보면 ‘록시딴느(옥시타니 여성)’다. 수업이란 으레 시험을 보고 나면 기억에서 휘발되는 것인데, 뇌의 어딘가에 이런 내용이 잠자고 있다가 시기적절하게 떠오르니 신기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감격에 혼자서 마음이 벅차올랐다. 오타쿠의 특징이 '갑자기 혼자 벅차오르는 것'이라던데. 이 마음을 주체 못 하고 친구들에게 메신저로 중계했다. 얘들아, 여기 남부라고 오크어 쓴다. 아니, 그 오크 말고. 친구들에게 오크어는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돼지 머리 괴물이 쓰는 언어일 뿐이다. 오타쿠는 외롭다.

남부에 왔으면 홍합 요리를 먹어야 하는 법. 홍합 찜을 판다는 가게를 찾아 온 몽펠리에를 돌아다녔다. 덥다가 춥다가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땀도 좀 흘리고 배고프고 지친 참이었다. 한 브라스리에 앉아 홍합 찜과 맥주를 주문했다. 전채요리로 나온 치즈 그라탕과 샐러드, 빵은 나쁘지 않았다. 이윽고 홍합이 나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뚜껑을 열고 한 입 먹자마자 실망했다. 윽, 이게 뭐람. 짜고 비리고 아무 기교도 느껴지지 않는 무식한 요리였다. 홍합을 이렇게 쓸 거면 청양고추랑 마늘 썰어 넣고 물 잔뜩 넣어서 탕 끓여 주지. 한국인은 마음으로 울부짖었다. 그래도 맥주를 벗 삼아 어찌어찌 다 먹고 일어났다. 아침에 먹은 맥모닝을 끝으로 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걷기만 했으니 시장이 반찬이었다. 25cl짜리 맥주 한 잔에도 금방 열이 오르고 어지러웠다. 아무래도 이제 몸이 좀 지친 모양이었다. 일찍 숙소로 돌아가 불도 못 끄고 기절했다. 꼬박 8시간을 채워 잤다. 다행히 졸린 와중에도 다음 날 방문할 도시의 숙소는 예약하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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