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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반짝 Mar 09. 2024

행복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 행복하다

그저께, 변호사가 작성한 답변서 초안을 보았다. 어쩌면 나보다 내 마음을 잘 대변해 주었을까. 다른 사람이 보아도 시어머니와 남편의 행동은 잘못된 행동이었다. 그동안의 설움이 위로받는 듯해 나는 다시 눈물이 났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서 양치를 하는데 먹은 것도 없는 빈 속에서 심하게 구역질이 났다. 구토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심하게 토하고 나니 노란 쓸개즙까지 나왔다. 지난번 경찰서 조사받으러 가는 날도 이렇게 빈속에서 쓸개즙을 토했는데.. 나는 평소 소화력이 약해 구토를 할 때도 많았지만 이토록 심하게 구역질을 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았다.


근처 병원에서 소화불량으로 진료를 받으며 최근 내가 겪은 일들을 이야기했다. 처음 보는 여자 원장님은 다정하게도 내 얘기에 관심을 가지고 공감을 해주었다. 그래서 한동안 수다를 떨었다.


약을 받아서 가지고 나와서 소화가 잘 될 것 같은 소고기국밥을 먹었다. 먹고 나니 컨디션이 좀 회복이 되는 것 같았다. 오후에는 동네 앞산으로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앞산은 등산 코스가 여러 개 있는 나즈막한 산이다. 나는 한 시간 정도가 걸리는 코스 입구에 차를 대 놓고 에어팟을 끼고 산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임윤찬의 피아노 연주가 너무 멋있었다. 등산 코스에 나 혼자였지만 산길과 음악의 조화가 기가 막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분명 ㅇㅇ산 둘레길이라고 해서 올라왔는데… 갑자기 내 앞의 길이 끊어지고 암벽타기를 해서 내려가야 하는 길이 나온 것이다. 나는 산책을 생각하고 편한 원피스를 입고 나왔기 때문에 미끄러질까 봐 너무 무서웠다. 그냥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그래도 정상에서 보는 노을이 너무 멋있다고 해서 조심조심해서 내려가보기로 했다.


암벽을 타고 내려오니 산 능선 너머에 강이 휘몰아치며 흐르는 모습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아… 너무 멋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전남편과 예전에 텐트를 쳤던 야영 캠핑장도 보였다. 지금은 텐트가 하나도 없었다.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서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보려고 하니 올라서서 경치를 볼 수 있는 크고 너른 바위판이 있어 거기로 갔다. 바위 너머는 완전히 낭떠러지였다. 나는 발을 극도로 조심스럽게 옮겼다.

여기서 넘어지면 끝장이다. 여기서 넘어져서 떨어지면 아마 모두가 나를 남편에게 이혼소송과 고소를 당한 것을 비관해서 산에서 뛰어내렸다고 생각할 거야. 또 시어머니와 남편은 내가 산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하면 뭐라고 할까? 분명 자기들한테 그렇게 나쁘게 굴더니 천벌을 받았다고 생각할 거 아냐.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되지. 생각만 해도 복장이 터진다. 죽어도 이럴 때는 절대 죽으면 안돼. 진짜 조심해야겠다.

천벌을 받아 죽은 사람이나 전남편에게 버림받아 뛰어내린 사람이 되기 싫어서 정말 식은땀을 흘리며 발을 옮겼다. 휴.. 그런데 바위에서 구경을 다 하고 내려와서 계속 가려고 하니까 엄청난 철제 계단을 끝없이 내려가는 길이 있지 않은가? 여길 내려가면 이따가 다시 올라와야 하는데.. 다리가 아픈데 이 계단을 올라올 생각을 하니 죽어도 못 가겠다. 그냥 여기서 돌아가야지. 나는 노을 구경을 포기하고 다시 극도로 조심하며 아까 내려왔던 암벽을 다시 올라갔다. 위험한 암벽타기까지 완수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안심! 나는 팔랑거리면서 등산로를 다시 신나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왠지 아까 온 길이랑 좀 다른 것 같은데 해가 지고 있어서 그런가보지 뭐. 하고 내려갔는데 내가 아까 출발했던 곳이 아니었다. 아까 거기에 차를 두고 왔는데..


그곳에서 아까 출발한 곳까지 아래쪽으로 돌아서 가려면 시간이 엄청 많이 걸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내려왔던 산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ㅜㅜ 해는 점점 넘어가고 길이 약간씩 어두워지는데 갑자기 해가 져버려서 미아가 되면 어떡하나? ㅠㅠ 그럴 경우에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하면서 올라갔다. 사실 그 정도로 긴 등산로는 아니었지만 나는 숨이 차서 계속 쉬면서 올라갔다.


올라가다 보니 나무들 사이로 해가 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숨을 고르면서 나무에 기대서 해를

바라보았다. 희망찬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노을을 바라보며 울었다. 마음이 벅차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다. 노을이 너무 아름답기도 했다.


산에서 실컷 눈물을 흘리고 다시 내가 출발했던 곳으로 내려오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는 다시 수정된 답변서를 읽었다. 오후에는 악기 레슨을 갔다. 지난번에 선생님에게 소송 때문에 레슨을 미루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며 내 얘기를 했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선생님과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연습을 마치고는 경찰서에 갔다. 지난번 조사받은 내용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해서 아버지에 대한 서류를 제출하러 갔다. 지난번에 한번 와 보았다고 이제 경찰서가 두렵지 않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경찰서에서 나와서는 대학원 지원을 위해 추천서를 써주신 분께 감사 인사를 보냈다. 미국 대학이라고 추천서를 영문으로 번역하고 계신 걸 내가 황급히 국문으로 제출 가능하다고 말렸다. 추천서를 써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나를 위해서 영문 번역까지 신경 써주시려 하신 마음이 너무나 감사했다.


저녁에는 네일아트를 하러 갔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네일아트였다. 일을 할 때는 전문적으로 보이고 싶어 체면을 차리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양이와 물고기가 있는 아주 깜찍하고 귀여운 네일아트를 골랐다. 기분이 너무 좋았당 ㅎㅎ. 네일아트를 받으면서도 원장님과 함께 계속 수다를 떨었다.


집에 와서는 좋아하는 음식을 시켜 먹었다. 변호사가 답변서를 제출했다는 알림이 왔다. 남편은 뭐라고 생각할까? 아빠한테서 연락이 왔다. 다음 주에 같이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는데 다리가 이상하게 붓고 아파서 내일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다고.. 나는 꼭 큰 병원에 가라고 했다. 이럴 때 지금 아프거나 잘못해서 죽으면 큰일이 난다고. 누가 우리가 천벌을 받은 거라고 고소해하면 정말 큰일이지 않냐고. 아빠에게 신신당부를 하면서 깔깔 웃었다. 나는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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