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 믿음을 갖는다는 것의 뿌리에는 ‘다른 사람의 가능성을 믿는다’라는 전제가 있다.
흔히 ‘교육’인지 ‘조작’인지를 가르는 것은 가능성을 믿어주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아이를 교육할 땐 아이에게 이미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다고 믿고 교육해야 한다.
Education의 의미는 ‘잠재적으로 현존하는 것을 나타나게 해 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교육의 반대는 조작이며, 조작을 하려는 사람은 상대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의 결여, 이에 더해서 아이의 옳지 못한 것을 어른이 고쳐놔야만 아이가 바르게 자라날 수 있다는 신념에 바탕을 둔다.
인간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적절한 조건만 주어진다면 인간은 평등하고 정의와 사랑의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다.
비합리적인 믿음은 강하고 전능해 보이는 힘에 굴복해서 이를 이상화하고 자신의 능력과 잠재력을 포기하는 데 근본이 있다.
합리적인 믿음은 나의 관찰력과 사고력의 결과를 믿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가능성의 발전, 이성과 사랑하는 능력의 힘을 경험하면서 점점 자신에 대해, 타인에 대해, 인간에 대해 믿음을 갖게 된다.
에리히 프롬은 합리적인 믿음의 뿌리를 ‘생산’이라고 말한다. 합리적인 믿음이 있다는 것은 생산적인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한다.
권력에 굴복하는 삶은 합리적인 믿음과 반대이다. 이미 존재하는 강한 힘을 믿고 아직 실현되지 못한 잠재력의 성장은 믿지 않는 것을 뜻한다.
권력 안에는 합리적인 믿음이 없다. 권력욕에 대한 추구, 강하게 존재하는 힘에 대한 굴복이 존재한다.
합리적인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당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믿는다는 것은 실망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신의 삶에서 안정과 안전이 최우선인 사람은 신념을 가질 수가 없다. 많이 소유하고 많이 쌓아두는 것을 목적으로 방어하며 사는 사람은 감옥의 죄수가 될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보이지 않는 신념을 우선에 두는, 삶의 전부를 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파괴적이고 과감하게 위험하게 살라는 무솔리니 식의 용기가 아니라, 삶을 사랑하고 가치있는 것에 믿음을 줄 수 있는 건설적인 용기가 필요하다.
이런 신념이 없는 사람은 늘 걱정하고 잠 못들며 자녀에 대해 근심하고 사람을 의심하며 살아간다.
세상 사람들이 내 판단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나의 판단력을 믿는 힘, 지금은 지지하는 이가 없더라도 나의 신념을 고수할 수 있는 힘, 모든 일에는 신념과 용기가 필요하다.
에리히 프롬은 이런 신념과 용기를 훈련하기 위해 첫 번째로 내가 언제 이런 신념과 용기를 포기하는지 의식하고, 두 번째로 이런 신념을 포기하기 위해 합리화하는 단계를 의식하며, 내가 언제 비굴한 태도로 내 신념을 저버리고 합리화하는지를 의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자신의 믿음과 신념을 배반하면 인간은 약해진다. 약한 사람은 점점 더 자신을 배반하게 되고 비굴해지는 끝없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상대에게 맡기고 아무것도 보증받지 못한 채 가치있는 것을 이룰 것이라는 믿음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사랑은 믿음, 신념의 행동이며 신념이 없다면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은 또한 활동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에 대해 끝없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영역에서 생산적이다. 일에서는 생산적이고 사랑에서는 비생산적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는 기업이나 정치인에 의해 또는 관료제 속의 관리자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다. 집단적인 암시가 있기에 사람들의 목표는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다. 더 잘 먹고 잘 입지만 인간성이나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는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무시하는 사회는 결국 인간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사랑이 결여된 사회에서 사랑이라는 가치를 잊지 않기를 응원한다.
-마인드토피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