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에 대한 내 대답이다. 나 하나 사랑하기에도 벅찬 세상이다. 하물며 내 이웃을 사랑하라니 가당치도 않다. 그럼에도 그 가당치 않은 일을 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하려고 애면글면 노력하고 있다.
‘사랑하다’는 어떤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일순간의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변함없이 아끼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이런 마음은 어디서 시작될까? 먼저 나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다. 나 자신을 오롯이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찌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마음의 우선순위를 자기 자신에게 두어야 주변을 돌아볼 힘이 생긴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기준의 가치를 바르게 알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닐까? 삶의 지향점을 이웃이 아닌 내게 두는 것이 먼저다. 이러한 개개인의 자기 사랑이 한데 어우러져 우리 사회를 좀 더 유연하게 가꾸어준다. 나는 그렇게 믿어왔고 실천해왔다. 하지만 최근 이러한 믿음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요즘 코로나19로 야기된 한국교회의 민낯을 마주하고 있다.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나 일부 기독교 단체와 목회자들이 왜곡된 생각과 잘못된 행동을 일삼고 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의 가치와 그것만을 소중이 여기는 모양새다.세상에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기보다는 “세상의 섬”이 되어 나와 이웃을 위협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실로 개탄스럽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하는 참척의 쓰라림으로 마음이 께적지근하다.
나는 40년 차 기독교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영향과 부모님의 가르침, 윤리교육 등을 통해 “~하지 마라”에 누구보다 순응적이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다. 하지만 오랜 세월의 경험을 통해 안다. 하지 말라고 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하지 마라”는 성경 말씀과 생활 속 조언은 넘치고 넘친다. 수백만 가지도 넘는 듯하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마라’, ‘두려움이 인생을 결정하게 하지 마라’, ‘토익 독학 이것만은 하지 마라’, ‘부동산 투자 절대로 하지 마라’, ‘예쁜 척하지 마라’, ‘프러포즈, 그럴 거면 하지 마라’, ‘남들이 다 한다면 당신은 하지 마라’, ‘척하는 경청을 하지 마라’, ‘남의 마음을 읽으려 하지 마라’,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라’ 등등
반면, “~하라”는 것에 대한 성경 말씀과 조언은 그렇게 많지 않다.성경에서 몇 안 되는 “~하라” 중 대표주자는 “사랑하라”다. 40년의 신앙생활이 무색할 정도로 이를 실천하기 쉽지 않다. 어렵고 어렵고 어렵다. 수백만 가지의 “~하지 마라”는 쉬운데 이 하나가 죽도록 어렵다.
나는 “~하라”보다 “~하지 마라”가 더 많아서 좋다. 하지 말라는 건 안 할 수는 있는데 하라고 하는 건 하기가 너무 힘들다. 하지 말라는 건 의식적으로 피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하라고 하는 건 내 의지를 넘어 몸을 쳐서 실천을 해야 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결국 몸을 쳐 실천에 옮겨야 가능한 일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시대, 기독교는 왜 우리 사회에서 민폐를 넘어 지탄을 받고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본질에서 벗어나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인 가치 추구와 자기애 때문은 아닐까? 헌법 제20조 1항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를 주장하기에 앞서 나를 위해, 이웃을 위해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현장예배에 힘쓰는 것만큼이나 부름 받은 이의 공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중세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답습하지 말고, 초기 기독교 신앙인들의 헌신과 실천을 되새기를 간절히 바란다. 방역당국의 지침에 따라 비대면 예배를 진행하길 간곡히 부탁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 본연의 가르침을 다시 돌아봐야 할 때다. ‘오직 예수’를 넘어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