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출기한이 8047일 지났습니다.

[22년 만에 대학원생]

by Bara belita

숙제가 있다.

사실 숙제를 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미룰 수 있는 만큼 최대치로 미루어 놓은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가 있었다. 대학원 진학은 마음 한편에 사라지지 않고 늘 묵직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숙제 같은 존재였다.


나의 첫 직장은 유전체연구센터였다. 지금과는 다르게 당시에는 학부를 졸업하고도 진입할 수 있는 연구소나 연구실이 꽤 있었다. 정말 운이 좋게 삼성전자(주)소속 생명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유전공학이라는 학부 특성상 대학원 진학률이 높았지만 많은 친구들이 먼저 취업을 선택하고 대학원 진학을 좀 더 생각해 보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그 부류에 한 사람으로서 사실 대학을 졸업하고도 하고 싶은 일이 찾지 못한 상태였다. 실험실 생활은 잠깐의 신선함과 오랫동안 이어지는 반복 업무의 연속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스스로 연구원이란 호칭이 과연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저 테크니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때가 대학원을 진학을 고민했던 첫 시점이었다.


나의 쓰임은 무엇일까?, 나는 생산자인가? 이런 물음이 계속해서 들 때마다 조직을 바꾸던지, 대학원을 진학하던지 선택해야 했다. 돌이켜보면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존재다. 나는 그때마다 이직과 전직을 선택했고 막연한 대학원 공부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렇게 숙제의 기한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2~3년 주기로 대학원을 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시기가 찾아왔지만 만성적인 버릇으로 치부해 버렸다. 그렇게 시간 참 잘도 흘러 학부를 졸업하고 20년이 넘은 시점에 나는 컨설턴트로서 프리랜서의 삶을 살고 있었고 빠르게 변하는 지식기반의 주제들을 발 빠르게 배우고 전달하는 숨 가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식을 흡수하고 재생산하여 전달하는 컨설턴트에게 배움은 연속적인 작업이었다. 현기증이 느껴질 만큼 새로운 주제들이 생겨나고 배움에 대한 내적 고통이 더해지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발생하며 프리랜서의 생활도 변화가 찾아왔다. 대면행사는 모두 비대면으로 전환되고 강의와 멘토링의 주제 스펙트럼은 여전히 넓어지고 있었다. 집에서 화상회의를 통해 업무를 수행하면서 개인의 시간을 많이 확보할 수 있는 점은 다행이었다.


잉여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 고민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명리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불교가 종교가 아니라 진정한 깨달음을 위한 구도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명리학 또한 미래를 예측하는 ‘점’이 아닌 자기에 대한 이해와 사건들 속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역동성이라고 생각한다.


왜 갑자기 그랬는지 또는 정말 운명의 실타래가 작동을 했는지 명리학 선생님께 “대학원을 가야 할까요?”라고 던진 질문에 “임수일간에 힘을 실어줄 임인년과 계묘년이 연달아 있어 공부가 더 잘 되겠구나~” 답을 얻었다. 평범했던 그 조언이 마음에 씨앗으로 심어져 뿌리는 내리고 싹을 틔웠다. 어느새 대학원을 선정하고 모집공고를 보고 입학지원서와 학업계획서를 분석하고 있었다.


나에게 대학원 진학은 높은 학구열이 가진 사람이 가야 하고 수준이 다른 공부를 해야 하며, 어렵고 힘들고 확신이 없다면 넘보지 말아야 하는 영역이었다. 그래서 막연한 두려움으로 들여다보기보다는 피하는 선택을 해왔다. 명리학 선생님이 건네준 말이 힘이 되어 나는 두려움을 직면하였다. 생각해 보면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말을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어날 일은 언젠가 일어나고 그 속도는 미루어놓은 시간만큼 가속도가 붙는다고 했던가?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여 3개의 대학원에 합격하였다. 합격증을 받고 나니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지만 묘한 성취감도 함께 들었다. 하지만 누군가 귀에 대고 걱정스럽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과제 제출기한이 8047일 지났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