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아직 망하지 않았다_2

어른의 상상력이란 고작.

by 제인


나는 겉보기에 아주 심심하고 보잘것없는 애였다. 어른들은 늘 바쁘거나 아팠고, 남동생과는 앙숙이었다. 친한 친구와 헤어져 부산으로 전학 가서도 '사투리 안 쓰는 서울깍쟁이'라 놀림당하며 한참을 겉돌았다. 사교육은커녕 부모님 형편이 나아지기 전까지 제대로 된 어린이 전집 한 질이 없었으니, 돌이켜보면 적잖이 가난하고 외로운 시기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심심함이 가장 빛나고 창의적인 내 유년기를 빚어냈다는 것이다. 책이 없으니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서 읽었고, 큰아버지가 가져다준 윤선생 영어교실의 중고 테이프 60개를 늘어질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덕분에 미국의 펜팔 친구와 어설프게 편지도 주고받았다. 동네 대여점에서 500원 내외의 각종 만화책과 소설,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하루 종일 보다가, 밤이면 장면들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 재생하고 변형시키며 외로움을 이겨내기도 했다.


그 공상들은 단단하지 않은 현실에서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는 상상을 만들었고, 몇몇 상상은 꿈이 되었으며, 돌아보니 몇몇 꿈들은 정말 이루어졌다. 하지만 밥벌이와 유튜브 시청과 타인과의 비교로 이렇게 심심할 틈 없는 어른이 되는 건 상상해 보지 않았다.




아마 요즘 성인들 열에 아홉은 상상 말고 이런 공상을 할 것이다. 10년 전 영끌로 개포동 재건축에 갭투자 했다면? 코로나로 주식과 비트코인이 폭락할 때 어디라도 넣었다면...?

나 역시 뉴스를 볼 때나 아이의 학원비가 부담스러울 때, 이사 집 알아볼 때, 노후가 불안할 때, 그러니까 거의 매주 매월 돈에 관한 상상을 한다. 어차피 과거로 돌아갈 수 없고 신박하지도 않으니, 공상도 아니고 그냥 망상에 가깝다.


어린 시절 우리의 무한한 상상 속 인물과 모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빙봉처럼 망각의 쓰레기장 속에서 영원히 소각된 것일까...? 다시 심심해져야겠다. 현실에 발 딛고 있어도 바다를 헤엄치는 법을 잊어서는 안 되니까. 부표를 띄우고 건너가는 힘, 상상을 현실화할 내 안의 에너지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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