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천국, 천국!
이시구로 마사카즈, 『천국대마경』
이선민
이시구로 마사카즈 作, 『천국대마경』은 『월간 애프터눈』 2018년 3월호부터 연재되고 있는 SF 만화다. 2023년 6월 기준, 단행본은 8권까지 발간되었으며 TV 애니메이션 또한 방영 중에 있다.
이시구로는 전작인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에서 비일상의 세계를 표방했었다. 소개하는 『천국대마경』에서도 비일상을 다루는 것은 동일하나, 이번에는 순서를 바꿔 비일상 속에서의 일상을 표방하고 있다. 그의 아이덴티티로 자리잡은 비일상에 대한 사유가 돋보인다. 대재앙(이하 아메노누보코) 이후 도쿄에서 심부름 센터를 운영하는 ‘키루코’는 어떤 여성으로부터 ‘마루’를 ‘천국’으로 데려가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만화의 주역인 ‘키루코’와 ‘마루’는 ‘히루코(또는 히토쿠이)’라고 불리는 식인 괴물을 처치하며 천국을 찾아 헤맨다. 일상 속에 침투한 환상적인 존재들을 처리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주인공의 모험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독자에게 전함으로, 전작과 동일한 플롯을 차용하였다.
아포칼립스는 SF의 하위 장르로서 다양한 예술로 이야기되고 있다. 이 장르는 대게 환원의 속성을 가진다. 종말 이전의 인류가 이룩한 문명이 전부 붕괴된 세계에서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이 소수의 인간들은 문명을 복구하거나 문명의 초기를 따라가 군집의 형태를 띄는 등 문명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다. ‘문명’ 그 자체를 기본값으로 두고 그것을 위해 조금씩 전진하는 서사를 가진다. 비일상이 되어버린 일상에서 붕괴 이전의 일상을 구축한다. 이미 황무지가 된 곳에서 그 이전의 시대를 떠올리는 허망함을 등에 이고 그 누구보다 선명하게 전진해 나가야 하는 것이 주인공의 사명이다. 그러나 전부 산화되어 버린 곳에서 전진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붕괴 이후의 사람들이 추억하는 그 이전의 시대를 표방해 문명을 재건한다면, 그 시대가 가진 관습이나 단점 또한 재건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은 2000년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등장함으로 나타나 탈-문명적 방안을 제시한다. 이시구로는 해당 질문을 차용해 문명을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소년만화의 기본적인 플롯인 ‘모험’을 이용해 ‘천국’을 찾는 이야기로 『천국대마경』을 진행시킨다.
“일반적으로 성장서사는 등장인물이 인지하는 내적 시간축, 혹은 서사무대에 적용된 외적 시간축을 따라 진행된다. 반면에 모험서사는 등장인물의 이동에 따라 그가 머무는 장소 혹은 배경이 전환되는 과정, 곧 공간축을 따라 진행된다. 그런데 모험과 성장의 요소가 복잡하게 얽힌 양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콘텐츠도 매우 많다. 등장인물의 모험 과정 및 결과에 따라 성장이 두드러지는 경우도 있고, 더 성숙한 단계로 등장인물이 진입해가는 중 공간배경의 전환이 인상적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성장서사와 모험서사는 입사서사, 교양서사와 이웃하면서 서로 착종된 형태로 나타나곤 한다.” 안숭범.(2016).포스트 아포칼립스 스토리텔링에 내재된 성장과 모험.영화연구,(68),99-122.
『천국대마경』은 앞서 제시한 인용구의 “모험과 성장의 요소가 복잡하게 얽힌 양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콘텐츠”에 부합한다. 또한 “등장인물이 진입해 가는 중 공간 배경의 전환이 인상적으로 제시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등장인물이 인지하는 내적 시간축, 혹은 서사 무대에 적용된 외적 시간축을 따라 진행된다.”와 같은 서술이나 “등장인물의 이동에 따라 그가 머무는 장소 혹은 배경이 전환되는 과정, 곧 공간축을 따라 진행된다”는 서술과는 다른 서술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천국대마경』에서는 두 가지의 공간이 제시된다. ‘토키오’라는 인물이 존재하는 ‘천국’과 ‘키루코’와 ‘마루’가 존재하는 ‘마경’으로 공간이 뚜렷하게 분리되어 있다. ‘천국’은 질서정연하나 ‘마경’은 폐허이다. 이 두 공간은 하나의 세계관 아래 작가의 뛰어난 역량과 그 동안 쌓아 왔던 노련함으로 공존하고 있다. 작가는 비선형적인 시간축을 두어 ‘천국’과 ‘마경’을 분리해 두 공간의 이야기를 교차하여 보여 준다. 이 서술 방식은 칸 만화 연출을 사용해 장면이 전환되듯 과거와 현재를 다양하게 오가며 진행된다. 이로 인하여 독자는 혼란을 겪는다. 이는 독자가 읽기에 있어 매끄럽게 진행할 수 없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시구로가 왜 이런 서술 방식을 차용해 독자에게 혼란을 주는가이다. 등장인물 또한 각자의 이유로 혼란스럽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은 붕괴가 야기한 혼란을 안고 살아간다. 이시구로는 이를 통해 ‘붕괴’의 감각을 독자에게 심어 주고 싶었던 듯 보인다. ‘천국’과 ‘마경’의 이야기를 분리하지 않고 보여 줌으로 선형적 시간 순서의 전개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대신 공간과 시간 감각을 분리함으로 서사 그 자체를 파편화시킨다.
이시구로는 이러한 비선형적 시간 흐름을 전작인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에서도 보여준 바 있다. 해당 작품의 주인공인 ‘호토리’가 머리를 자르는 에피소드를 삽입해 ‘호토리’의 3년 동안의 고교 생활을 그의 머리 길이로 추측할 수 있도록 연출한다. 44화를 기점으로 이발한 ‘호토리’의 머리 길이는 길어지거나 짧아진다. 2월에 해당하는 44화와 4월에 해당하는 48화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48화의 호토리’는 ‘44화의 호토리’보다 머리카락이 조금 더 길다. 그러나 그 사이에 연재된 46화는 44화와 48화에서 소개되는 직전 해, 12월이기 때문에 ‘호토리’의 이발 에피소드보다 그 이전에 존재하는 시간이다. 동일한 시간축 내에서 사건을 비선형적으로 배치하여 독자가 호토리의 헤어 스타일에 따라 작중 배경의 시간을 추측할 수 있도록 돕는다. 『천국대마경』에서도 같은 양상이 나타난다. 24화부터 서로에 대한 애정을 표하던 타카하라 학원의 원생인 ‘안즈’와 ‘타카’는 49화에 이르러 타카하라 학원의 분실에서 작은 결혼식을 올린다. 이 타카하라 학원의 분실은 ‘키루코’와 ‘마루’가 25화에서 발견한 공간이다. 주인공 일행이 타카하라 학원의 분실에서 발견한 ‘이상한 마크’는 ‘안즈’와 ‘타카’가 그린 ‘자신들만의 신’이다. ‘천국’은 ‘아메노누보코’의 이전 시간대이며, ‘마경’은 ‘아메노누보쿠’의 이후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등장인물들이 이러한 비선형적 시간 위에서 언제나 현재형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이전도, 그 이후도 현재형으로 그려내 다른 공간과 시간대의 인물이 공존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처럼 파편화된 서사 구조는 해체 감각을 띈다. 언제나 현재형으로 이야기되는 등장인물들은 다른 시간대의 인물들과 결합된다. 텍스트 혹은 설정의 전복은 이때 일어난다. 독자는 파편화된 서사 구조를 짜맞추며 작품 내에 직접적으로 편입된다. 이처럼 독자의 참여를 요하여 즐거움을 이끌어내는 장치가 된다. 아래 사진은 그에 부합하는 장면이다.
해당 장면에서는 ‘타카하라 학원의 선생들’의 회의 장면이 나오고, ‘키루코’가 광선 총을 사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천국’과 ‘마경’을 오가는 서술 방식이 두드러지는 장면이다. 과거의 일―그러니까 ‘아메노누보코’ 이전의 일을 먼저 삽입하고, ‘아메노누보코’ 이후의 일을 다음에 삽입하는 것으로 독자가 은연중에 ‘키루코’가 가진 광선 총은 ‘타카하라 학원’에서 만들어졌구나를 알 수 있게 하는 장면이다. 이처럼 칸 만화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연출로써 서사 내에서 불필요한 서술을 제외시킨다. 칸과 칸 사이의 간극을 통해 이시구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명확해진다. 이야기의 흐름과 비선형적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거나 유보되는 형태를 띄며 이 서술 구조는 메타텍스트를 함의하게 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시구로는 칸 만화에 대한 이해가 높다. 자신의 아이덴티티인 일상 속의 비일상을, 자신이 매번 차용하는 서술 구조를 사용해 이야기의 흐름에 방해될 만한 것은 모두 제하고 ‘대사로 말해야 할 것’과 ‘묘사로 보여 주어야 할 것’을 완벽히 구별한다. ‘천국을 찾는다’는 목적 의식을 뚜렷하게 가져가면서 말이다. 그것은 주로 배경을 묘사하거나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가령 ‘묘사로 보여 주어야 할 것’은 이런 것이다.
해당 장면은 ‘의리모반파의 사무소’를 임시 거처로 쓰는 주인공 일행의 모습이다. 그들의 뒤로 보이는 배경은 너저분하고 급박한 누군가의 모습이 상상되도록 묘사되어 있다. ‘아메노누보코’ 당시 다급하게 대피해야 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여 세세하게 묘사해 설명이나 대사 없이 독자에게 보여 주고 있다.
해당 장면은 주인공 일행의 예절성을 보여 주는 장면이 아니라, ‘아메노누보코’ 이후 사람들의 청결에 대한 의식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이시구로는 지나칠 수 있는 부분에 특정 사물들을 배치하여 앞서 이야기한 ‘묘사로 보여 주어야 할 것’에 대한 부분을 명확히 한다. 등장인물의 행동 묘사나 배경 묘사 등을 이용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음으로써 독자에게 만화 내의 설정을 추리하는 맛을 선사하기도 한다.
『천국대마경』이 가지는 매력은 이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물에 대한 특징을 부여하여 독자에게 자신이 가지는 의문을 제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키루코’는 사실 ‘타케하야 하루키’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이다. 거주하던 마을에서 ‘히루코’를 처치하던 와중 부상을 입어 혼수 상태가 된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보니 그는 자신의 누나인 ‘키루코’가 되어 있었다. 성별에 특이점을 가지는 인물은 ‘키루코’뿐만이 아니다. 타카하라 학원 3기생인 ‘미치카’는 남녀의 성기가 둘 다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바디 디스포리아를 겪는 주인공이 등장하거나, 인터섹스―만화 장르에서 흔히 후타나리라고 명명되는(작중에서는 양성구유라는 단어로 표현되었다)―주인공이 등장하는 것은 만화 장르 내에서 드문드문 등장하는 소재다. 다만 다른 작품과 차별화되는 이유는 작가가 성별의 전환을 어떤 마법이나 추상적인 것에 기대지 않고 확실한 이유를 제시한다. ‘키루코’가 의식이 없을 때 마을을 지나치던 ‘의사’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이유로 그를 개조한 것이다. 작중에서 ‘키루코’는 자신에게 고백하는 ‘마루’를 거절하며 “몸은 여자지만 뇌는 분명히 남자”라고 이야기한다. 작가는 ‘키루코’를 통해 인간의 성별이 육체로 정의되는지, 정신(뇌)로 개조되는지 고민하는 ‘키루코’를 통해 자아 실현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천국대마경』은 아직 연재 중인 작품으로 ‘의사’를 대면한, 혹은 대면하지 못한 ‘키루코’가 자신의 성별을 정의 내릴 것인지,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지는 미수에 그친다.
‘인간성’에 대한 근원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생명의 표현이다. 그 생명의 표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을 충동이라 부른다. 또한 감각계에 살면서 변화되는 것은 내가 지내고 있는 환경이다. 인격도 변하긴 하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비해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변화 불변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모든 것이 변화해 버린 ‘키루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를 살고 있는 ‘키루코’를 통해 보여지는 작가의 질문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 혼돈을 겪는 것은 이미 사회에 문제로서 만연해 있다. 현실과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넘나드는 관점으로 보았을 때, ‘키루코’는 실천 이성의 영역에 있다. 도쿄에서 심부름 센터를 운영하는 ‘키루코’는 어떤 여성으로부터 ‘마루’를 ‘천국’으로 데려가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만화의 주역인 ‘키루코’와 ‘마루’는 ‘히루코(또는 히토쿠이)’라고 불리는 식인 괴물을 처치하며 천국을 찾아 헤맨다. 이처럼 ‘키루코’는 목표 의식을 분명히 세우고 자신이 무엇을 해내고 살아야 하는지 뚜렷이 알고 있다. 바로 실천 이성의 자기 주의에 있는 것이다. 감성만 강하고 이성이 없는 것, 이성만 강하고 감성이 없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이것을 조화롭게 해야만 비로소 인간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키루코’는 이 관점에서 봤을 때 자아 실현의 영역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아직 나오지 않은 『천국대마경』의 결말, 그러니까 ‘키루코’는 자신의 성별을 어떻게 정의 내릴 것인지, 아니면 정의 내리지 않을 것인지에 대해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미 실천 이성의 자기 주의에 있는 ‘키루코’는 자신의 성별이 육체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있다고 깨달을 것이다. 자신이 이룬 목표를 돌이켜보며 원하지 않게 가지게 된 신체가 자신의 여정에 어떤 역할을 주었는지 또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했듯, ‘키루코’의 모험은 감성과 이성을 조화롭게 만드는 모험이라 할 수 있겠다.
작가가 제시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향해 달려가는 『천국대마경』, 강간 묘사와 같은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지는 장면들 또한 존재하지만 그가 가지는 비일상과 일상이라는 주제, 그리고 그것을 서술하는 서술 방식과 같은 특징들이 이시구로의 작품을 기대하게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