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게 바라본 하나의 세계
이선민
임지은, 『이 시는 누워 있고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민음사, 2024), 임승유, 『생명력 전개』(문학동네시인선, 2023)
우리는 익숙하고 일상적인 것보다 새롭고 낯선 사물들을 더 유심히 바라본다.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보다 불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에 더 기민하게 반응한다. 러시아의 문학 비평가인 빅토르 슈클로프스키는 익숙한 대상에 대한 자동화된 인식에서 벗어나, 낯설게 보는 것을 통해 특정 대상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예술 기법을 ‘낯설게 하기’라 명명했다. 시는 일상 언어를 낯선 방식으로 사용해 시적 언어를 만든다. 일상 언어는 정보를 담고 있어 언어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들지만, 시적 언어를 사용해 낱말 자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낯섦을 느끼게 한다. 일상 언어와 시적 언어가 충돌하는 이 시도는 일상의 이데올로기를 언어로 하여금 신선한 것으로 만들어 낯선 것을 체험할 수 있게 만든다.
우리는 대상의 전부를 보지 않고 주요 특징만으로 그것을 인지한다. 마치 봉지에 담겨진 것처럼 그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그 형태에 의해 그것이 무엇인지 알긴 하지만 단지 그것의 윤곽만을 볼 뿐이다. 산문적 인식을 통해 인식되었기 때문에 그 대상은 희미해지고 첫인상조차 남지 않는다. 결국에는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조차 잊힌다.
임지은과 임승유는 낯설게 하기를 자유 자재로 사용한다. 습관화된 틀 속에서 벗어나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고, 사물을 처음 대면할 때의 인식을 회복시킨다. 첫 대면 시에 튀어나온 감각은 희미해져 없는 감각으로 치부되는데, 임지은과 임승유는 그 감각을 온전히 지닌 채로 사물을 인식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안전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가장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을까? 두 시인은 스스로 잘 안다고 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동시에 자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스스로와 주변 사물/상황/장소들을 낯설게 바라본다.
여기 두 시인이 낯설게 바라본 세계가 담긴 시가 두 편 있다.
사람들이 둥근 것을 좋아해서/서울에는 원이 많다//학원 병원/식물원 동물원 유치원//동그란 식탁에 모인 동그란 얼굴/동그란 컵에 담아 마시는/동그란 웃음//태어난 자리에서 죽은 나무가/밑동만 남겨진 채 잘려 나가는 걸 볼 때/동그란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식물도 특별히 살고 싶은 곳이 있을까?/한여름에 얼음을 껴안고 있는 펭귄은 남극을 기억할까?//사람들이 좋아해서/심은 나무와 좋아해서 잡은/생선과 좋아해서 데려온 동물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사람들에게 좋아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졌다//시간이 원을 좋아해서/시계가 둥근 것이 아니듯/세상엔 좀 더 많은 모양이 필요하고//휴일에 찾은 식물원은 문을 닫았다//식물도 깊은 잠이 필요하니까/잠자는 나무를 따라 눈을 감았다 뜨면//하늘에 새들이 피어 있었다/횡단보도가 얼룩말인 척 누워 있었다/침대에 심어 놓은 인간이 뿌리로 걸어 다녔다
―임지은, 「식물원에 와서 쓰는 동물원 시」 전문
일요일까지 일을 끝내야 해서 만두를 못 해먹고 있다. 냉동실에 만두가 바닥난 지는 한참 됐다. 꺼내 먹어야 할 만두가 안 남아 있으니 일이 손에 안 잡힌다.//마감도 하면서 만두 만들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다가//만두에 대한 시를 쓰기로 했다. 만두를 미리 끌어와 시를 쓰고 시에 언급된 만큼 만두를 만드는 것이다//일요일이 오면//아무 생각 없이 만두에 매달리기 위해//지금은 만두만 생각하자. 만두란 무엇인가. 나는 만두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만두는 만두 만드는 일요일에 도착할 수 있는가. 그럴 때의 만두란 언젠가 먹어본 적 있으며, 오래 사귀던 사람과 헤어진 날 모퉁이 만두 가게에서 혼자 먹던 만두인데//오오 여기서의 만두란 그런 서정적 만두여서는 안 됩니다.//드디어 일요일 아침이 시작될 때//하루종일 만두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만두는 늘어나서 온 겨울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인가//그런 게 중요한 만두입니다.
―임승유, 「만두」 전문
두 시는 ‘쓰기’에 관한 시로 메타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시 자체로 현실을 형성하는 세계관이 부각된다. 임지은은 제목 그대로 식물원에 가서 동물원에 대한 시를 쓰고 있고, 임승유는 만두를 먹기 위해 만두에 대한 시를 쓴다. 임지은은 어떤 특정 장소에서 ‘원’이라는 도형 또는 글자를 낯설게 바라보고 있다. 임승유는 만두라는 대상을 아주 많이 말해 버리는 방식(제목을 포함해 ‘만두’라는 단어는 총 22번 등장한다)으로 만두 자체를 낯설게 만들고 있다.
낯설게 하기의 전달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이 소격 효과를 독자에게 어떻게 설득시킬 것인가?’이다. 임지은은 일상적이고 전형적인 단어를 가지고 와 그 단어에 붙어 있는 ‘원’에 집중한다. ‘동그란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며 두 가지의 질문을 한다. 그 질문은 인간과 결부되어 있으나 인간이 관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부 인간이 꿰차고 있을 식물이 살 만한 자리와 인간의 무궁한 발전으로 사라지고 있는 얼음을 껴안은 펭귄을 생각한다. 이렇게 독자가 인간이기만 한다면 공감되는 환경 문제를 사용해 ‘동그란 질문’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질문이 동그랗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동그란 질문이 무엇인가에 대한 어렴풋한 이해가 적용된다. 하지만 곧 질문이 동그랗다는 것에 포함된 심상을 우리는 “시간이 원을 좋아해서/시계가 둥근 것이 아니듯/세상엔 좀 더 많은 모양이 필요하고”라는 연에서 짐작할 수 있다. 「식물원에 와서 쓰는 동물원 시」는 ‘원’이라는 도형 또는 글자를 질문의 형태로 만들어 독자에게 건넨다. 그 질문에는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타파하자는 메시지가 들어가 있다. 더 나아가 마지막 연인 “횡단보도가 얼룩말인 척 누워 있었다/침대에 심어 놓은 인간이 뿌리로 걸어 다녔다”를 보면 생물(인간)의 세계와 비생물(비인간)의 세계를 결합시킴으로써 낯선 공간과 대상을 만들어 낸다. 임지은은 ‘원’이라는 대상을 낯설게 만들어 메시지가 독자에게 가닿을 수 있도록 만드는 동시에, 공간과 대상을 전복시켜 원래 알던 것을 처음 보는 것이나 이상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러한 시도는 임지은이 시에서 담고 싶었던 메시지를 세계관으로 만들어 그 세계관에 속한 것들은 무엇인지 이야기될 수 있게 한다.
임지은이 공간과 대상을 일상적인 단어로 흩뜨려 놓는다면, 임승유는 일상적인 단어를 아주 많이 남발한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되었던 노래가 있다. ‘팥죽송’이라고 불리는 플래시 애니메이션이다. 해당 애니메이션은 후크송을 배경 음악으로 두고 가사로 오소리를 뜻하는 badger라는 단어를 반복한 것이 특징이다. 한국에서는 이가 ‘팥죽’으로 들린다며 팥죽송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당시 이 노래가 나왔을 때 팥죽송에 심취한 중학생이 자살했다거나, 12시간 동안 반복해서 들으면 언어 장애가 생긴다거나 하는 도시 괴담이 존재했다. 또한 이라크 전쟁을 빗대었다는 식의 해석이 존재하기도 했다. 이렇듯 단어 하나를 반복했을 때 발생하는 감각은 우리를 낯설게 만들기에는 충분하다. 임승유의 「만두」 또한 일상적인 단어를 반복해 만두라는 단어 자체를 낯설게 만든다. 시의 내용은 아주 단조롭다. 일을 해야 만두를 먹는데, 만두를 먹어야 해 할 일을 못하겠다. 그러니 시에 언급된 만큼의 만두를 만들어 먹겠다는 내용이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만두라는 단어가 계속 호명되며 나타나는 감각이다. 시가 끝날 때쯤 만두는 더 이상 시인이 먹고 싶어 하는 만두가 아니라 음식을 넘어서서 “서정적 만두”이기도 하고, “온 겨울을 함께할 수 있”을 정도의 어떤 상황 같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임승유는 “그런 게 중요한 만두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만두와 온 겨울을 함께하는 게 중요해, 그것만을 생각하겠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한다. 즉 임승유는 만두라는 단어 자체를 전복시켜서 ‘겨울 내내 만두를 먹고 싶은 마음’을 낯설게 보여 준다.
이 두 시에서의 공통점은 낯설게 하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임지은과 임승유 모두 리듬감을 살려 낯설게 만들고 있다. 임지은은 ‘원’과 ‘동그란’ 것에 집중해 독자들이 동그란 발음을 내뱉게 만들었으며, 임승유는 ‘만두’를 ‘만드’는 것에 집중해 리듬감을 살렸다. 두 시인의 낯설게 하기는 이러한 리듬감을 통해 일상에서 벗어나 더욱 낯설어지는 효과를 나타낸다.
임승유는 단어를 반복해 호명하는 방식 외에도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다.
다음은 「종묘」의 전문이다.
어쩌다 거기까지 갔는지 모르지만 버스를 타고 한참 가야 나오는 오래된 집 앞에 서 있었다. 양손에는 모종삽과 화초를 들고서.//빛이 쏟아져내리는 마당으로 걸어가//땅을 판 후에 들고 있던 화초를 심고 돌아오면 되는 그런 장면 속에 있었을 뿐인데. 나는 어느새 주인이 되어 집안으로 들어가 모자와 장갑을 챙겨들고 현관문을 나오고 있었다.//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내가 몇 년 동안 거실에 모아두었던 화초를 다 옮겨 심고 나서야 돌아갈 때가 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돌아와서는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화초를 심기만 하고 물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 허사였다. 왜냐하면 나는 어떻게 하면 다시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던 것은 혼자서 그 먼 곳으로 갔다가 돌아왔다는 점인데//내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임승유, 「종묘」 전문
임승유는 ‘어리둥절한’ 화자를 등장시켜 모든 것을 낯설게 만든다. 「만두」와 마찬가지로 내용은 단촐하다. 오래된 집에 가서 화초를 키웠지만 다시 그곳에 갈 수 없고, 그곳에 어떻게 갔는지조차 알 수 없는 화자가 등장한다. 독자는 시를 읽는 내내 어리둥절한 상태로 놓인다. 화자가 모든 것에 대해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주인이 되”었고, 거실에 있던 화초를 마당에 옮겨 심는다. 화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목적이나 이유 같은 것을 전혀 모른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더 의아한 것은, 화자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버스를 타고 한참 가야 나오는 오래된 집 앞에 서 있”을 수가 있을까? 독자는 이렇게 어리둥절한 화자에게 감화되어 자신도 어리둥절해진다. 원래라면 중요했을 이곳은 어떤 곳인지, 마당은 넓었는지, 좁았는지, 화초는 어떻게 옮겼는지 따위의 것은 중요하지 않다. 화자에게 낯선 공간에 가 낯선 행동을 하는 속성을 부여해 그 자체를 낯설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종결된 이후 화자와 독자에게 남은 감각은 ‘대체 뭐지?’와같이 ‘무슨 일이 벌어졌지만 영문을 모르겠는’ 감각 그 자체이다. 임승유는 「만두」와는 다르게 낯설게 하기를 공간의 전복과 화자의 태도를 통해 보여 준다.
또 임지은도 임승유와같이 이전 시와 다르게 낯설게하기를 시도한다.
다음은 그 시도가 엿보이는 「혼코노」의 전문이다.
외로운 날에 부릅니다/일본어 잘 모르지만/혼코노/혼코노//여긴 혼자 와도 모릅니다/아무도 당신에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당신은 한국어를 잘합니까?/한국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하겠지만//한국어는 뜨거운 국물이 시원한 것만큼 이상합니다//여기 자리 있어요, 가/자리가 없다는 뜻도 있다는 뜻도 되니까요//그럼 나 여기 있어요,는/내가 있기도 없기도 한 상태입니까?//그래서 왔습니다/혼코노/혼코노//자주 오면 단골이라고 하던데/여긴 무인 상점이군요//혹시 CCTV를 돌려 보던 주인이/저 사람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할까요?//그럴 리가요/전 오늘 처음인 걸요//사실 일본어는 잘 몰라도 됩니다/혼코노는 혼자 코인 노래방의 줄임말이거든요//한글과 영어가 섞인 글자의 줄임말이/일본어처럼 들린다니/이상하지 않나요?//아무렴 어때요/이젠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랫말처럼/그 일은 머릿속에서 지우겠습니다//혼코노 혼코노//동전만 될 것 같은데 의외로/카드도 됩니다
―임지은, 「혼코노」 전문
「혼코노」는 ‘혼코노’라는 낯선 단어를 일상 속으로 이끌어 더욱 낯설게 보이는 것을 선택한다. 임지은의 낯설게 하기는 ‘혼코노’라는 단어에 국한되지 않고, 더 나아가 한국어의 낯선 점과 단골―무인 상점의 낯선 점을 포착한다. 또한 “이상하지 않나요?”와 같은 직접적인 질문을 통해 해당 시 속에서 보여 주고 있는 자신의 세계가 얼마나 낯선 곳인지에 대해서도 보여 준다. “혼코노 혼코노” 반복하는 것이 노랫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는 화자가 보이는 태도에 연관이 있다. 화자는 자신이 보는 세계와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 전반에 나타나는 묘한 거리감은 독자에게 하여금 세계 자체를 낯설게 보이게 만든다. 이러한 태도는 임승유의 「종묘」와는 거리가 있다. 「종묘」에서의 화자는 화자 자체로 어리둥절했지만, 임지은의 「혼코노」의 화자는 모든 것을 알지만 일정 부분 이상 보여 주지 않고 질문을 함으로써 독자에게 어리둥절한 태도를 가지게 한다. 이러한 과정은 ‘혼코노’라는 공간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고 낯선 공간에서의 폭넓은 사유를 보여 주어 사물의 본질을 다시 인식하게 만든다. 임지은의 화자는 스스로 공간을 낯설게 재구성하지만, 임승유의 화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화자를 내세워 일상적인 공간을 낯설게 바라보도록 한다.
해당 비평에서는 임지은과 임승유의 작품을 통해 ‘낯설게 하기’라는 예술 기법을 연결시켜 탐구해 보았다. 두 시인은 일상 언어를 새롭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사용하여 독자가 사물의 본질을 다시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또한 리듬감이나 화자의 태도를 통해 독자가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감각을 경험하도록 만들며, 시를 통해 현실을 형성하는 세계관을 표현한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화자와 함께 어리둥절한, 그러니까 낯선 상태를 경험하며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게 된다. 독자에게 익숙한 것의 본질을 재조명하고 일상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두 시인의 낯선 세계를 선망하며 비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