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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바램 Apr 05. 2024

아직 씌여지지 않은 연필

마음챙김의 시





손에 꽉 쥔 연필을
힘이 풀려 떨어뜨렸다.
평상시라면 냉큼 허리 숙여
주우려 들 텐데
좀처럼 숙여지지 않는다.

​멍.

​멍하니 쳐다본다.
누가 주워 건네주길 기다리는 건가?

그것도 아니다.

왜 안 줍고 있지?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인 건가?


연필 위로 개미가 넘나 든다.
넘나 든다.
너무나 힘들다로 읽히는 걸 보니
넘나 든다는 건 부지런함이구나.


난 지금 농땡이를 피우고 싶은 거고.
그래서 줍기 싫구나.
이럴 땐 튀는 것만이 답이지.


떨어진 연필은 개미가 가져다 쓰던지
떨어진 것이라 더럽게 여기지 않는
누군가 주워 벤치에 뭐라도 쓰겠지.


아이들이 오가는 곳엔
온통 연필이 새긴 마음들이 있으니까
때론 익명
때론 성명
악명만 아니면 괜찮지.









아직 씌어지지 않은 것


이 연필 안에는
한 번도 씌어지지 않은 단어들이
웅크리고 있다.
한 번도 말해진 적 없고
한 번도 가르쳐진 적 없는 단어들이.

그것들은 숨어 있다.


그곳 까만 어둠 속에 깨어 있으면서
우리가 하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밖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사랑을 위해서도, 시간을 위해서도, 불을 위해서도.


연필심의 어둠이 다 닳아 없어져도
그 단어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을 것이다.
공기 중에 숨어서.
앞으로 많은 사람이 그 단어들을 연습하고
그 단어들을 호흡하겠지만
누구도 더 지혜로워지지는 않는다.

무슨 문자이길래 그토록 꺼내기 어려울까.
무슨 언어일까.
내가 그 언어를 알아차리고
이해할 수 있을까.
모든 것들의 진정한 이름을 알기 위해.


어쩌면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이름을 위한 단어는.
오직 한 단어일지도.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일지도.
그것이 여기 이 연필 안에 있다.


세상의 모든 연필이 이와 같다.

<마음 챙김의 시 120p / W.S. 머윈>






오직 한 단어를 쓸 수 있다면 무엇을 쓸까 생각하니 바로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안 녕'


 아직 씌어지지 않은 지난 삶을 이해하기 위해 연필심이 닳았다.

아직 씌어지지 않은 것을 살아간다.

원하는 장르는 로맨스코미디지만 때론 액션 스릴러도 즐기는 편이다. 그렇지만 이제 공포물은 후덜려서 못 보겠다.


이 연필 안에는 한 번도 씌어지지 않은 단어들이 웅크리고 있다.


누군가의 웅크린 단어가 겨울잠에서 깨어나길_
일단 나부터 기지개를 켜자.

옆구리 결린다.


헛둘헛둘






​*2년 전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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