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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쓰다미리 Mar 09. 2024

남편의 내면아이 업어주기

P. 90
토라진 사람의 진짜 메시지는 지극히 퇴행적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아직 젖을 먹는 아기이니, 지금 당장 나의 부모가 되어줘야 해.
무엇이 나를 아프게 하는지를 정확히 헤아려주어야 해. 내가 아기였을 때, 사랑에 대한 관념들이 처음 형성되었을 때, 사람들이 그래주었든 말이야”     
토라진 연인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호의는 그들의 불만을 아기의 떼쓰기로 봐주는 것이다.      

                                                                          알랭드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중에서

 

MBTI 신봉자로서 남편은 극 I, 나는 극 E다. MBTI가 유행하기 전에는 남편은 AAA형이고, 나는 OOO형이라고 말했다. 남편은 평소에는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을 매우 어색해하고,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을 매우 불편해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화가 났을 때는 자신의 감정 상태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그 자리에서 원인과 이유를 정확하게 밝혀내어 누구의 잘못인지 결론이 나기를 원한다. 반면, 나는 평소 업되어 있고, 감정과 의견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화가 났을 때는 차갑도록 차분해지고, 입을 닫고 만다.


연애 초에는 데이트 중에 다투면 나는 집에 가겠다고 하고, 남편은 얘기하고 가라며 실랑이를 벌였다. 내가 입을 닫는 이유는 단 하나, 흥분되고 제어되지 않는 상태에서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여 줄 마음은 하나 없이 서로를 비난하고, 상처되는 말만 쏟아내는 싸움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싸워봤자 결론은 매번 “그래서 나만 잘못했어? 너는 뭘 잘했는데~~”의 핑퐁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혼자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나면 그때는 자연스럽게 풀리기도 하고, 서로를 이해하기도 하며  풀리는 문제를 왜 그렇게 지금, 당장, 해결하자고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하다 보니 이제는 다툰 후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침묵의 시간을 선택했고, 우리 집에서 토라지는 사람은 주로 남편이다. 토라진 후 남편은 집안일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평소 하지 않던 행동들을 반항의 표현으로 하기 시작한다. 반대로 나는 침묵의 시기에는 서로의 기분을 최대한 언짢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안 하던 집안일을 찾아서 하고, 식사를 더 잘 챙기고, 아이들과 더 밝고 재미있게 지낸다. 그래서 싸울지 않을 때는 집에서 청소하고, 아이들과 놀아주고, 침대에 한 번도 눕지 않던 남편이, 싸울 때면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다가 식사시간이면 밥 한 그릇을 다 먹고 다시 침대에 눕는 걸 보며 ‘그래, 나는 당신보다 더 크고 나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당신을 품어주겠습니다. 내가 더 나은 사람입니다’를 주문처럼 외운다. 이렇게 나는 나의 자존감을 챙기면서 내 할 일을 하다 보면, 어느 날 남편이 쭈뼛쭈뼛 청소기를 돌리고 거실로 나와 있다. 이건 사과하고 싶은데 사과를 못 하겠다는 뜻으로 이럴 때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해 준다.      


- 미리 : 사과하고 싶으면 사과해도 돼.

- 남편 : 사과할게.

(서로 꼭 껴안고 뽀뽀해 주기)     


이 루틴을 만들기까지 수 없는 시행착오와 울고 불고의 나날들, 이혼하자는 말을 달고 살았던 날들이 있었다. 싸우고 화해하고, 싸우고 화해하고를 반복하다 보니 남편이 자신의 감정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 때문이라고, 남편의 토라짐이 ‘나는 아직 젖을 먹는 아기이니, 무엇이 나를 아프게 하는지를 정확하게 헤아려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알랭드 보통 작가님께서 토라진 연인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호의는 아기의 떼쓰기로 봐주는 것이라고 하니 남편의 내면아이를 업어준다는 생각으로 더 많이 안아줘야겠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아이들을 키울 때도 떼쓰기를 봐주지는 않았던 것 같...................... 흠흠흠)




P. 123
세상은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번번이 우리에게 혼란과 실망, 좌절과 상처를 안긴다.
그래도 우리는 거의 언제나 불평하지 못한다. 우리가 불만 목록을 노출할 수 있는 사람. 인생의 불의와 결함에 대해 누적된 모든 분노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우리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적으면서도 우리가 마구 소리를 치는 동안에도 우리 곁에 머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에게 불만을 쏟아놓는 것이다.

분별 있고 예의 바른말은 모르는 사람에게 할 수 있지만, 밑도 끝도 없이 무분별하고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믿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뿐이다.      

                                                                       알랭드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중에서


소설 속 라비와 커스틴은 결혼기념일 여행을 다녀와서 공항버스를 탄 순간 라비의 핸드폰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라비는 화가 치민다. 뿐만 아니라 침착하고 동정적인 커스틴의 태도는 그녀가 그에 비해 얼마나 태평하고 운이 좋은지를 강조할 뿐이다.

진작부터 이 무모하고 쓰잘머리 없는 여행을 가는 게 아니었단 걸 알았지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모든 것이 어찌 보면 아내의 탓이다.  


남편 : 미리야, 저 0000차는 내부도 넓고, 차박 할 때 에어컨 틀고 자도 돼. 우리 나중에 차박 여행 다닐 때 저 차가 진짜 좋을 거 같아

미리 : 우리 나중에 같이 여행 다녀?

남편 : 애들 다 크고 나면 우리 둘이 차박으로 여행 다녀야지.

미리 : 삐~~~ 당신은 나와 여행 다니기에 적합한 파트너가 아닙니다. 당신은 여행의 매력인 계획되지 않은 우연의 행복을 알지 못하고, 계획에 집착하며, 수시로 변화하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당신은 ISTJ들의 여행 모임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편 :............................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결혼 후에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게 됐다.

결혼 후 ISTJ 그 잡채씨와의 여행은 여행 시작부터 끝까지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하고, 

앞으로의 결혼 생활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들이었다. 거기에 자아가 생긴 두 딸들의 의견까지 더해져서 여행지에서 무언가를 결정하는 일은 스트레스 치수가 우주를 뚫는 수준이기 때문에 굳이 이 일을 1년에 몇 번씩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편의 대학 친구들과 1년에 1~2번씩 가는 가족 동반 여행에서 나의 남편은 세상에서 제일 다정하고, 모든 것에 수용적이고,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하는 딴 사람을 만나게 된다. 돌아오는 길에 내가 남편의 이중적인 태도를 말하면 남편은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불편하잖아. 너랑 있을 때는 편하니까 내 맘대로 하는 거지.”


중 2 사춘기 소녀인 큰 딸과도 자주 다투는 이유가 친구들과 통화할 때는 그렇게 다정하고, 모든 조건을 다 수용하며 “어, 괜찮아, 네가 좋은 시간 선택해도 돼.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가족들과의 일정에서는 조금만 틀어지거나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온갖 짜증과 신경질을 내기 때문이다.


- 미리: 지예야, 왜 동생한테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해?

- 지예: 아, 쟤가 짜증 나게 하잖아.

- 미리: 친구들이 짜증 나게 하면 친구들한테도 그렇게 대해?

- 지예: 친구들은 남이잖아. 가족들은 편하니까 그러지.     

 


정재승 교수님이 집사부일체에서 이 얘기를 했을 때 너무나 공감했다.

"나를 생각하는 뇌가 있고 타인을 인지하는 영역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가까운 관계일수록 나와 가깝게 저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통제하고 싶어 한다. 나와 엄마를 다른 존재가 아닌 한 몸이라고 생각해서 통제되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이다"라고 가까운 존재에게 화를 내는 이유를 설명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사람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무기력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라며 "각자의 인생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서로 행복할 수 있고 그것이 진짜 사랑이다"라고 얘기해서 한동안 우리 부부는 아직 어른이 덜 된 것일까 깊은 생각에 빠졌었다.


알랭드보통은 이 책에서 이렇게 결론지었다.

라비와 커스틴 모두 성인인 된 파트너의 내면에 감춰진 불안한 유년의 자아를 어떻게 안심시킬지를 익혀왔다. 그렇기에 서로를 사랑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성인인 라비와 커스틴의 원시적 자아 어딘가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성숙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라면 가능한 수준보다 더 많이 세상을 제어해야 한다고 고집한다. 이것이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토록 화가 나고 좌절하게 되는 까닭이다.


유년시절 부모님의 기적 같은 능력을 보고 감탄했던 것처럼 상대방한테도 그만큼의 능력을 요구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더 화가 나는 거라는 보통작가의 말과 우리의 뇌가 가족을 나와 동일시해서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이라는 뇌과학자의 말에 위로를 받아, 남편이 나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편하게 대해서 그런 것이니이것을 그 사람의 단점이라고 부각해 문제 삼지 말고 남편의 내면아이를 업어준다는 생각으로 살아보자고 또 다짐을 해본다.(역시 프로다짐러답군.)



얼마 전, 장항준 감독의 이 영상을 남편에게 보내줬더니, 남편이 하는 말.


- 이 사람은 아카 쓰잖아. 그니까 친절하지. 나도 아카 쓰면 세상 제일 친절할 수 있어.

- 아카가 뭐야?

- 아내 카드!


이 씨..........

내면 아이 좋아하시네.

내가 이런 인간하고  무슨 대화를 하며, 무슨 으이그............으으으으으으으으으(두 손 불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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