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된 공간으로 극도의 몰입을 유도하는 독창적인 스릴러

영화 '폰부스'

by 이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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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800만명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살고 있는 대도시 뉴욕. 근방의 교외까지 합치면 그곳에는 대략 1000만대의 전화기가 서로 연결돼 있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핸드폰을 사용하며 공중전화를 대체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공중전화를 사용한다.


뉴욕의 미디어 에이전트 스투 세퍼드는 자신의 고객이자 신인 배우인 팸과 불륜을 저지르는 용도로 공중전화를 사용한다. 어느 날, 공중전화 박스에서 통화를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그의 뒤에서 벨 소리가 들린다.


무심코 수화기를 든 순간 스투의 예기치 않은 악몽이 시작된다. 전화를 건 정체불명의 남자는 자신이 스투의 일거수 일투족을 근처 건물에서 지켜보고 있으며, 전화를 끊으면 총으로 쏴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스투는 정신병자의 장난 전화려니 생각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 남자와 얘기할수록 자신이 뭔가 심상치 않은 함정에 빠졌음을 깨닫게 된다.


곧 이어 전화박스에서 나오라며 자신에게 시비를 걸던 사내가 총격을 받아 즉사하는 것을 본 스투는 극한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잠시 후, 주변 사람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스투를 살인자로 간주하고 그에게 일제히 총을 겨눈다.


한 순간 공중전화 박스에 갇혀 이름도, 얼굴도 모를 남자의 감시를 받으며 경찰과 대치하게 된 스투. 한편 이 사건의 지휘를 맡은 형사반장 라미는 대치 상태에서도 계속 수화기를 들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스투를 심상치 않게 여기고 상대방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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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국내 개봉한 영화 ‘폰부스’의 줄거리다. 이 작품은 ‘의뢰인’, ‘타임투킬’ 등의 스릴러와 배트맨 시리즈 등으로 유명한 조엘 슈마허 감독이 연출하고, 저예산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래리 코헨이 시나리오를 맡았다. 1300만 달러의 저예산으로 제작되어 총 9780만달러이상의 흥행 수익을 올리며 화제를 모은 스릴러로, 특히 러닝타임 80분의 짧은 시간을 실시간에 가까운 긴장감으로 가득 채우며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한정된 공간, 한정된 시간동안 벌어지는 스토리를 다룬다는 점이다. 주인공 스투가 공중전화에 도착하기 전까지 길을 걷는 동안에는 통화 음성으로 미디어 에이전시로서 그의 스케줄과 일처리를 정신없이 보여주며, 이후로는 오로지 그가 붙잡혀 있는 공중전화로 카메라를 집중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으며 공중전화에 갇히는 신세가 된 스투. 협박범은 실제 한 사람을 살해하며 이 상황이 장난이 아님을 알리고, 이로 인해 공포에 질린 스투는 협박범의 요구에 응하거나 목숨을 걸고 대항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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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관객들은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상황에 숨을 죽인 채 그의 행동과 그를 둘러싼 경찰 등 주변 상황에 주목한다. 경찰이 그에게 총을 쏠 것인지, 경찰은 언제쯤 이 상황을 알아차릴 것인지, 스투는 협박범의 지시에 따라 그의 치부를 현장에 나온 아내와 불륜녀 팸에게 고백할 것인지, 과연 범인의 정체는 무엇인지 여러 가지 복잡하게 얽혀 전개되는 요소들에 집중하며 길지 않은 시간 극도의 몰입감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설정은 독특한 실험성과 속도감 있고 영리한 전개로 이어지며 이 영화만의 강점이 된다. 거대한 도시 뉴욕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안에서 마치 연극을 보듯 한 지점으로 집중된 현장감과 생동감을 제공한다.




잊어버린 일상의 죄의식을 건드리다


이 영화를 보면서 한정된 공간,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만으로 주인공을 컨트롤하는 협박범 등의 설정에서 많은 이들이 하정우가 주연한 국내 영화 ‘더 테러 라이브’를 떠올린다. 하지만 장치적 설정이 아닌 메시지적 측면으로 접근하자면 개인적으로 ‘쏘우’라는 또 한 편의 스릴러가 떠오르기도 한다.


쏘우의 악인 직쏘는 암을 앓고 있는 환자로, 죽음과 맞닿아 있는 삶을 살면서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다른 등장 인물들에게 목숨을 건 게임을 강요하며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려 하려는 사이코 범죄자다. 폰부스의 협박범 역시 이와 유사한 성향을 보인다. 그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들을 응징하기 위해 이와 같은 악행을 벌인다. 스투와의 통화에서 그는 이전에 포르노 영화 제작자와 대기업 간부를 응징한 바 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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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들에 비하면 미디어 에이전시라는 명목 하에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아내 몰래 불륜을 저지르는 스투의 죄목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관객들마저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범행동기의 희생양이 된 스투는 목숨이 걸린 공포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타의이긴 하지만 자신의 죄를 모두 앞에서 고백하게 된다.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그가 보이는 반응이 단지 공포에 의한 것인지 그 동안의 삶에 대한 반성에 대한 것인지 명확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보며 일상에서 어쩌면 우리에게 익숙할지 모르는 수많은 크고 작은 죄들을 떠올리게 된다.


협박범이 왜 하필 스투를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 부분은 이 영화의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 된다. 협박범은 나름의 논리로 죄를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의 정체도, 세부 동기도 나오지 않고, 이 일과 상관없는 타인의 목숨까지 희생시키면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러한 부분은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죄와 그것을 응징하는 자격, 방법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가져온다.


하지만 어쩌면 이 영화에서 이는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실험적 설정과 구조를 형성하기 위한 큰 의미 없는 배경으로만 간주하더라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그러니 잠시나마 살아가면서 내가 거쳐 간 크고 작은 오점들을 돌아보고 마주하는 듯한 감정적 경험만으로도 이 영화의 메시지적 의미는 충분하지 않을까.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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