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고칠 건 고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입시다(5)
최근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의 강연을 들을 일이 있었다. 1970년대생인 그 분은 본인 연령대 한국인의 기대수명을 140세 정도로 본다고 말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각종 통계를 통해 연구한 결과라는 말도 덧붙였다.
140세가 조금 과장되게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현재 경제활동 인구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100세까지는 살 수 있을 걸로 기대되는 세상이다. 정년은 60세. 대다수의 우리는 은퇴 후 그 동안 일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버텨내야 할지 모른다.
취업 연령이 늦어지는 자녀들을 결혼 전까지 뒷바라지하고 일정 부분 결혼자금을 지원해주는 것이 하나의 문화인 우리나라에서 연금만으로 버티기에는 굉장히 긴 시간이다. 특히 그 긴 시간을 ‘소비의 즐거움’만으로 채우기에는 금전적으로도 부족할 게 뻔하고, 삶의 만족도나 건강한 긴장감을 유지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지금은 현재 일이 있든, 없든 전국민이 취준생이 된 시대구나.
은퇴 후 우리는 다양한 선택지를 가질 수 있다. 그 동안의 경험을 살려 창업을 할 수도 있고, 지금까지 해왔던 일과 다른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수도 있다. 중장년, 노년층 대상 공공기관 프로그램을 보면 자신의 오랜 꿈을 찾아가거나, 문화해설사, 생태해설사, 숲해설사 등의 새로운 직업을 찾은 이들을 지원하는 과정을 상당히 많이 볼 수 있다. 공공근로나 간단한 아르바이트 등 소일거리로 적게나마 소득을 올려 연금과 함께 생계 자원으로 삼고 소소하게 살아가는 분들도 많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인생 2막의 준비가 닥쳐서 준비해도 될 만큼 만만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더 무서운 것은 AI의 발달 등 현재 산업계의 변화를 보면 정년까지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는 점이다. 어떤 이들은 회사에서 밀려나기 전에 스스로 먼저 자생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당장 40대만 되더라도 현 직장을 떠나면 새로운 자리 찾기가 쉽지 않다. 이직이 곧 연봉과 커리어의 점프 업이 되는 시기가 굉장히 짧아졌다. 하지만 눈을 낮추기에는 현실적으로 필요한 소득 수준이 있기 때문에 차라리 창업을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많은 이들이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는 것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흐려지면서 회사 내에서 인정 받는 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고, 왠지 내가 일한 만큼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고 느끼는 이들도 많다. 그래서 ‘회사를 위해’ 너무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쉽게 내린다.
하지만 이는 자칫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일은 무조건 열심히 해야 한다. 과거에도 선배들은 ‘받은 만큼만 일하겠다는 생각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 더 열심히 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 의미와 배경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내 성장, 커리어 개발을 위해 직무 스킬을 고도화 하는 것, 더 과거에는 회사에 대한 기여도, 충성도를 몸으로 증명함으로써 인정 받고 승진하는 것을 그 의미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회사에서 충성도를 인정 받는 건 시대착오적이고, 언제 어떤 기술이 등장할지 모르는 세상에서 현재 직무기술이 언제까지 유효할지도 장담할 수 없다.
지금 이 시대 우리가 ‘돈 받는 만큼 일한다’는 관점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 ‘열심히 일해야 한다’의 개념을 다시 봐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내 연봉만큼만 일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수동적으로 주어진 업무 지시만 이행하는 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한다. 기업과 노동자의 계약관계에서는 충분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게 내게 손해가 될 수 있다. 내게 일이 주어지면 그 작업이 연계된 전체적인 프로세스를 우리 팀의 과업을 넘어 유관 부서, 회사의 전체적인 사업 구조와 계획, 나아가 내 직무, 우리 회사의 업종이 걸쳐 있는 산업 전반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단순히 내 직무 스킬을 숙달하고, 주어진 일을 시간 내 지시 요건에만 맞춰 해결하는 것만으로는 회사의 울타리를 벗어난 세상에서 경쟁하기 쉽지 않다.
앞서 ‘전국민이 취업준비생이 돼야 하는 시대’라고 표현했지만, 그 문장에서 요구되는 취업준비생의 자격은 전문가로서의 시야, 스스로 인사이트를 포착하고 이것을 사업화할 수 있는 창업자로서의 관점과 역량이다.
현재 요구되는 직무 스킬을 고도화하고, 마감시간 내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는 경험도 당연히 중요하다. 쌓일수록 나만의 노하우와 일에 대한 가치관, 방향성, 태도를 구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유효한 것은 이직 한 두번을 거칠 때 뿐이다. 내 직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 내가 속한, 혹은 관심 있는 산업 분야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 기업의 생태 자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시대다.
송길영 작가는 ‘시대예보’ 시리즈를 연달아 발표하며 앞으로 고정된 고용관계가 아니라 프로젝트 단위로 더 활발하게 산업이 돌아가는, 개인 한 명 한 명의 당장 활용 가능한 능력이 소구되는 시대가 될 것임을 강조한 바 있지만, 이런 전망은 비단 그분만 이야기하는 화두가 아니다. 불확실한 미래의 강도와 범주는 더욱 강력하고 근거리까지 확장되고 있으며, 그래서 리스크는 피하고 기술과 시스템의 활용은 더욱 효율화하기 위해 조직의 단위와 프로젝트 운영이 점점 더 파편화될 것임을 많은 전문가들이 예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직무 스킬이 아니라, 더 넓게 보고 스스로 뽑아낸 탁월한 인사이트가 진짜 내 무기가 될까? 대부분 인사이트도 시간이 지나면 수명을 다한다. 더 중요한 것은 변화에 맞춰 끊임없이 인사이트를 발굴할 수 있는 시야, 감각,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 직무, 내 스킬이 연계되어 있는 산업 전반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오지랖이 있어야 길러진다. 내게 주어진 일만 기준에 맞춰 처리하는 정도로는 얻을 수 없는 능력이다.
나는 잡지사 기자를 거쳐 홍보맨으로 일반 기업에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곳은 사무가구 회사였고, 홍보를 담당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회사뿐 아니라 해당 분야의 시장상황과 기술, 제품적 변화, 트렌드 등을 배우고 익히게 됐다. 그리고 거기서 사무환경 연구자라는 새로운 포지션을 기회로 포착했고, 현재는 회사를 나와 독립적으로 그 일을 하고 있다.
만약 타 부서에서 자료 넘어오면 보도자료 작성하고, 그들이 주는 그대로 홍보 콘텐츠화 하는 작업에만 그쳤다면 나는 그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을 것이며, 아마 회사의 울타리를 벗어나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은 지금껏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혼자 일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고 사업화한 경험은 앞으로도 계속 시야를 확장하고 또 다른 새로운 기회로 연결시킬 수 있는 역량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내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지금 내 직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혹은 지금 열심히는 살고 있지만 뭔가 막연한 두려움이 든다면 시야를 넓혀야 한다. 아니, 그런 마음마저 들지 않고 그냥 받는 만큼만 적당히 일하고 있다면 더욱 그런 관점이 필요하다. 그래야 나에게 더 맞고 더 미래에 도움이 되는 기회를 스스로 포착할 수 있고, 지금 내 일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이것은 젊은 세대들에게만 통용되는 말이 아니다. 기성세대들도, 아니 은퇴에 더 가까운 기성세대일수록 내가 현재 주어진 ‘직급’적 사고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때다. 세상은 무섭게 변하고 있고, 언제 지금 내 일자리가 사라질지, 언제 회사에서 나가야 할지 모른다. 이전보다 일하기 정말 편해진 시대지만,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관점으로 치열해져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각자 개인의 생존을 위한 전략인 동시에,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동등해지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누구든 그 세대의 화법, 가치관, 개인의 성향과 상관없이 ‘치열하지 않은 상태’에 머무르는 순간 고립되고 뒤쳐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