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멸종까지 남아있을 진리의 단어 '인지상정'

2부 고칠 건 고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입시다(6)

by 이정석



우리나라 기업문화는 전통적으로 수직적 체계 속에 상급자를 중심에 두는 예의, 의전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왔다. 이는 현재 시점에서 회의, 보고문화의 비효율, 불필요한 야근 등 신속하고 효율적인 의사결정과 업무 처리, 직장 내 삶의 질과 인권을 저해하는 많은 부정적 관행들을 있게 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런 부분을 생각하면, 기존의 비효율적 관행, 악습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반발은 당연함을 넘어 합리적이고 건강한 조직문화를 위해 필요한, 오히려 권장되어야 할 반응이라는 생각까지 들 때가 있다. 이들은 하급자라는 이유만으로 동등한 노동자로 존중 받지 못하고, 불합리한 ‘보여주기 식’ 행태가 업무 효율을 저하시키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실 기성세대들도 당당히 나서지 못했을 뿐, 수도 없이 많이 뒤에서, 혹은 동기들과 상사들의 뒷담화나 직장인의 자괴감을 느껴 왔다. 그래서 젊은 직원들의 사이다 발언과 행동에 한편으로 시원함을 느낀다는 얘기도 자주 듣는다. 나 역시 그런 부분에 상당히 공감한다.


하지만 여러 사례를 보고 듣다 보면 종종 직급 체계와 이에 기반한 의사결정 방식, 직장 내 예절을 모두 상명하복의 억압적 문화이자 불합리하고 불필요한 눈치보기로 인식하는 경우를 접하게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정보의 수명과 습득에 필요한 시간은 갈수록 짧아지는 반면, 정보에 대한 접근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시대, 반드시 상위 직급자들만 유의미한 정보를 독점하는 것도 아니며, 정보의 독점은 오히려 조직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지목되고 있다. 이는 민주적인 의사결정 방식, 권한과 책임의 위임, 동등성 기반의 집단지성 극대화라는 일하는 방식과 문화의 변화 방향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이것이 상위 직급자의 의사결정권을 완전히 해체하는 것으로 해석돼서는 곤란하다. 이런 정보와 시장의 빠른 변화는 한편으로 미래의 불확실성을 가중시키며, 이는 중장기적 판단에 대한 리스크가 그만큼 과거보다 커졌음을 의미한다. 즉, 누군가는 그 리스크를 책임질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져야 하고, 결국 일정 수준의 위계성은 여전히 조직 운영의 중요한 요소인 셈이다.


결정으로 가는 과정에서 민주적인 의견 교환과 토론, 집단지성의 힘은 중요하지만, 결국 최종 결정은 특정 레벨에서 권한과 책임을 갖고 이후 하위 레벨에서는 빠르고 집중도 있는 실행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을 무조건 잘못됐다고만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직장 내 사적인 관계, 예의에 대해서도 조금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 권위에 복종하는 눈치보기는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이지만, 인간 관계에서의 예의와 배려는 개인과 개인, 그리고 조직의 유기적 연계를 위해 필요한 부분이다. 눈치보기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단지 그것이 오로지 상급자를 중심에 두고 나타나는 상황이 문제인 것이다.


싸가지 없어도 일만 잘 하면 되지. 불필요한 관계에 힘을 쏟기 보다는 주어진 업무 자체에 집중하는 게 효율적이지 않나?


그런 생각들은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리고 그들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인지상정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 사이에는 본능적인 정이 있고, 관계에는 일관적인 규칙이 있음을 내포하는 말이다. 이건 아무리 본질이 중요하다고 해도 배제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일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기업에게 영업은 어떤 업무 못지 않게 중요하다. 아무리 R&D나 기획이 중요한 성격의 회사라도 영업의 중요성을 간과하지는 않는다. 업무의 본질, 공정한 경쟁 등의 개념을 떠올린다면 불편한 진실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제품 그 자체, 실력 그 자체로 고객과 시장의 평가와 신뢰를 얻는 것이 정의롭거나 합리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가 알고 있다. 현실은 그렇게만 흘러기자 않는다는 것을. 만약 그런 수치 계산에 가까운 절대적 원칙으로만 세상이 돌아간다면 영업은 유통망 관리 수준에서 역할이 그치게 되고, 마케팅이 고객 구매의사를 이끌어내는 핵심 영역이 될 것이다.


같은 가격의 삼겹살집이라도 사장님이 음료수 하나라도 서비스로 주고, 내 얼굴을 기억하며 친근하게 인사하는 가게에 조금이라도 더 정이 간다. B2B 거래에서도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마주하고, 관련 상품과 시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며, 내가 업무적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 당장의 매출에 기여하지 못하더라도 신경 써주고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 거래처 담당자에 더 마음이 가고, 기왕이면 그와 거래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한다. 누군가 나에게 잘해준만큼, 도움을 준만큼 나도 그에게 잘해주고 도움을 주고 싶은 그런 것, 그것이 바로 인지상정이다.


인지상정이 특히 빛을 발할 때는 동등한 기능과 품질, 가격의 제품을 가진 경쟁자와 승부할 때다. 그것은 경쟁이 이뤄지는 모든 사회에서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늘 업무 성과와 능력을 평가 받기 마련인 회사라는 조직도 똑같다는 뜻이다.


사실 한 직장, 특히 같은 조직에서 근무하는 이들 중 업무 수행 능력이 월등하게 뛰어난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 비슷한 정보와 능력치를 갖고 있으며, 어지간히 적성에 안 맞는 직무를 맡거나 의도적으로 태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 자기 역할은 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들을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동료를 더 배려하고, 어렵고 티 안 나는 일에도 먼저 나서고, 같은 말이라도 사람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언어를 쓰는 사람을 더 높이 살 수밖에 없다.


말은 인지상정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단순히 ‘그냥 마음이 가서’의 문제만이 아닐 수 있다. 내 마음을 움직인 그 사람의 태도와 행동이 나중에도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 가능성이 높다는 경험칙상 판단 또한 거기 담겨 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결과는 우연히도 만들어질 수 있고, 개인기만으로는 언젠가 한계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의 진심어린 도움을 얻어내고, 신뢰감을 주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더 오래 좋은 결과를 만들고 꾸준히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세상에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인간이,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니 손해 보지 않으려면 그에 맞게 대처하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기대하는, 바라는 모습에는 분명 그 이유가 있다는 얘기다. 만약 상급자가, 동료들이 어떤 태도와 행동을 은연중 요구한다면, 그것이 진짜 불합리한 것인지, 인지상정으로 여기고 존중할만한 것인지 한번 고민해보기 바란다. 그 안에 내가 직장에서 가져야 할 태도와 예의의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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