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
계유정난이 조선을 뒤흔들고, 노산군으로 격하된 단종 이홍위는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길에 오른다. 강원도 영월 산골 마을 광천골의 촌장 엄흥도는 먹고 살기 힘든 마을 사람들을 위해 청령포를 유배지로 만들어 힘 있는 고관대작을 모시는 작전을 세우지만, 부푼 꿈으로 맞이한 이는 왕위에서 쫓겨난 이홍위였다.
유배지를 지키는 보수주인으로서 그의 모든 일상을 감시해야만 하는 촌장은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이홍위가 점점 신경 쓰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그를 겨우 구해내기에 이른다. 식음을 전폐하던 이홍위는 광천골 사람들의 정성으로 겨우 식사를 시작하고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는데……
최근 천만 관객 동원을 눈앞에 두고 장안의 화제로 떠오른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줄거리다. 이 영화는 ‘김은희의 남자’로 불리던 장항준 감독 작품으로, 유해진, 박지훈, 유지태, 전미도 등이 열연하며 장항준 최고의 흥행작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작품은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왕으로 꼽히는 단종의 마지막 기록을 다루고 있다. 특히 단순히 폐위된 왕의 비극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짧게 기록된 한 사내의 이름을 되살려 감동적인 드라마로 재구성한다.
영화는 계유정난으로 역모의 죄를 덮어쓰고 고문을 받는 단종 편의 신하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지켜보며 식음을 전폐한 채 실의에 빠진 단종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단종은 밤마다 악몽을 꾸는데, 그 악몽에는 자신을 따르던 신하들이 피 흘리는 원혼이 되어 등장한다.
단종의 고통은 숙부에게 배신당하고 왕위에서 쫓겨나는 자신의 몰락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자신을 따르던 이들에 대한 부채가 곧 그 고통의 근원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들, 그러나 그런 그들을 지킬 힘이 없는 연약한 자신에 대한 원망인 셈이다.
그런 단종은 광천골에 들어와 다시 한 번 자신의 백성을 만난다. 본인들의 끼니 해결하기도 힘든 처지에도 힘이건 재물이건 가진 것 없이 유배지에서 죽어갈 날만 기다리는 자신의 끼니를 걱정하는 이들을 만나며 비로소 웃음을 찾고 함께 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역사가 스포라고, 단종이 숙부 금성대군의 도움으로 다시 왕위를 노릴 것을 우려하며 결국 그가 고립된 유배지에서 자살하기만을 기다리던 한명회는 금성대군과 단종이 손을 잡는 순간을 노려 두 사람을 처단할 계획을 세운다.
이 과정에서 단종은 다시 한번 자신을 지켜준, 그리고 자신이 지켜야 할 백성들이 위기에 빠질 운명을 마주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저 무력하게 당하지 않는다.
먹히진 않았지만 관아에 끌려간 엄흥도의 아들이 곤장형으로 죽을 위기에 처하자 그토록 두려워하던 한명회 앞에 나서 일갈하고, 자신을 도운 엄흥도가 역적으로 몰리지 않도록, 한명회에 발락되는 순간 엄흥도에게 자신을 속였다며 분노를 토해내는 연기를 펼친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서사가 진행되는 동안 쌓인 관객들의 감정을 극으로 치닫게 하는데, 바로 세조가 내린 사약을 거부하고 엄흥도의 손에 의해 죽는 길을 선택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증폭이 아니라, 비로소 자신에게 주어진 자신의 백성, 자신의 나라에서 죽겠다는 단종의 다짐, 영화의 메시지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원해서 왕이 된 것도, 왕에서 밀려난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왕으로서의 삶과 죽음, 그 방식은 스스로 선택하며 진정한 역사의 왕이 되었다.
이 영화에는 주연인 유해진을 비롯해 벌크업과 함께 전에 없이 당당하고 강인한 캐릭터를 연기한 유지태, 생각보다 적은 비중에도 단종에 대한 애정과 애절함을 크지 않은 행보에도 애틋하고 실감나게 연기해낸 전미도, 영화 속에서 중간중간 긴장을 풀어주는 코믹 연기로 윤활유 역할을 했던 박지환까지 많은 배우들이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특히 기본 줄거리나 배역 비중상 이 영화는 엄흥도와 단종, 유해진과 박지훈의 브로맨스 영화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사실상 박지훈 한 배우의 작품이라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한다.
영화는 단종이 초반부 실의에 빠져 있던 시기부터 호랑이와 대적하고 광천골 사람들과 교류하며 생기를 찾던 시기, 분노와 결의로 금성대군과 손 잡고 다시 왕위를 되찾고자 결심한 시기, 모든 게 좌절되고 자신의 백성을 바라보며 마지막을 맞는 순간까지 박지훈이 맡은 단종의 심리 변화에 따라 극의 전개와 흐름이 형성된다.
때문에 주인공 단종의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분위기와 연기가 매우 중요한데, 박지훈의 큰 눈망울과 안정된 사극 톤은 이러한 전개에 최적화된 연기를 보여준다. 사실 영화 초반은 단종이 숨죽인 상태에서 유해진이 이끄는 일종의 농담 같은 분위기로 전개되며 장항준 이미지 특유의 가벼움이 느껴지는데 단종의 각성과 변화를 통해 급격히 드라마의 본질로 전환되는 모습을 보인다.
장항준 감독은 여러 인터뷰에서 ‘약한 영웅’ 시리즈를 보며 박지훈에게서 단종을 보았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 약한 영웅에서 박지훈이 맡았던 연시은은 조용한 우등생이 지능형 싸움꾼으로 변모하는 과정, 그 안에서의 지독한 내적갈등을 겪어내며 ‘왕과 사는 남자’ 속 단종과 비슷한 결을 보인다.
또한 박지훈은 이전에도 퓨전사극이긴 하지만 ‘조선혼담공작소 꽃파당’, ‘환상연가’ 두 작품에서 사극톤과 연기를 경험한 바 있다. 이 작품에서의 단종 연기는 박지훈이 이러한 과거 작품들에서 쌓아 온 경험들을 절묘하게 조합해 완성시킨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의 수준은 박지훈이라는 배우가 그냥 인기 아이돌 출신 배우가 아니라, 자신의 필모로 쌓아 온 경험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는 영민한 배우임을 증명한다.
지금도 박지훈은 아이돌 출신 남자 배우들 중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 영화를 통해 앞으로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높이고 있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