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 더 머니'
세계 최대의 부호, 게티 오일의 설립자 폴 게티의 손자가 납치됐다. 납치범이 요구한 몸값은 무려 1,700만 달러. 하지만 게티 3세는 이혼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고, 홀로 자녀를 키우고 있는 그의 어머니 게일은 그만한 돈이 없다.
게일은 아들을 구하기 위해 폴 게티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는 게일에게도, 세상에도 납치범에게는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단언한다. 대신 게티 오일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전직 CIA 요원 출신 직원 플레처에게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지시한다.
게일을 찾아간 플레처는 게티 3세가 친구들에게 했던 얘기를 기반으로 이 사건이 할아버지의 돈을 노린 자작극일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사건에 다가갈수록 그가 진짜 납치되었음이 확실시 된다.
서로 갈등하던 게일과 플레처는 다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다급해진 납치범들은 게티 3세의 귀를 잘라내 마지막 경고를 한다.
2018년 개봉한 영화 ‘올 더 머니’의 줄거리다. 헐리우드의 살아 있는 전설 중 한명인 거장 리들리 스콧이 감독 맡았고, 미셀 윌리엄스가 게티 3세의 어머니 게일 역으로, 마크 월버그가 전직 CIA 요원이자 사건의 협상가로 나선 플레처 역으로 출연했다. 이 이야기는 실화를 다루고 있다. 1960~70년대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큰 부호였던 폴 게티의 손자가 납치된 사건을 약간의 픽션을 가미해 재가공했다.
폴 게티는 유명한 사업가이자 미국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방문하는 미술관 중 하나인 게티 미술관을 만든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미술품에 큰 애착을 보였던 폴 게티가 생전에 수집한 유명 작가들의 미술품들을 전시한 곳으로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다. 세계적인 유료 이미지 서비스 게티이미지도 그의 이름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지독한 구두쇠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의 집에는 가족과 손님들이 장거리 통화하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유료 공중전화가 설치될 정도였다. 이 장면은 영화 속에서도 폴 게티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로 등장한다. 영화의 배경이 된 게티 3세 납치사건은 그의 돈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례로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어쩌면, 픽션보다도 가혹한 진실에 관한 이야기
게티 3세 납치사건은 세계 최대 부호의 손자가 납치됐다는 사건의 충격뿐만 아니라 1,7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몸값으로도 화제가 됐고 전 세계가 폴 게티의 대응에 주목했다. 하지만 그는 어찌 보면 정말 그답게, 그러나 모두가 경악할만한 답을 내놨다. 모든 언론이 주목하는 가운데 당당히 납치범들에게 몸값을 지불할 생각이 없음을 밝혔다.
폴 게티는 말했다. 나에게는 14명의 손주가 있으며, 이번에 납치범들과 타협을 하면 다른 모든 손주들이 범죄자들의 타깃이 될 것이다. 이것은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가족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였으며, 일견 타당한 논리로 여겨졌다.
만약 결말까지 해피엔딩이었다면, 혹은 완벽한 희생으로 끝났다면 폴 게티의 결정은 특별한 의미를 지녔을지도 모른다. 전자라면 정의는 곧 승리한다는 메시지를, 후자라면 정의를 위해 불의와 타협해서는 안 되며 이를 위한 희생은 숭고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세상에 던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맬 깁슨이 주연한 ‘랜섬’이라는 납치 영화가 있다. 주인공 맬 깁슨은 이 영화에서 납치범에게 몸값을 주는 대신 공개적으로 해당 금액만큼 현상금을 거는 방식을 택한다. 범인들은 혼란에 빠지고 갈등하다 분열하게 되고, 힘겨운 시간 끝에 아이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런 해피엔딩은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범인들은 갈등하고 당황하긴 했지만, 동시에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다. 그래서 폴 게티를 압박하기 위해 게티 3세의 귀를 잘라 세상에 공개하기에 이른다. 결국 폴 게티는 손자의 몸값을 지불하고, 게티 3세는 풀려난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뒷이야기가 밝혀진다. 폴 게티는 플레처를 통해 몸값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손자를 구출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몸값을 낮추기 위한 협상에도 착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범인들이 요구한 몸값은 300만 달러까지 내려갔다.
영화에서 폴 게티는 양육권을 갖는 대신 모든 권리를 포기한 전 며느리에게 양육권마저 포기하는 조건으로 몸값을 대주기로 한다. 심지어 그가 제공하기로 한 몸값은 220만 달러. 법적으로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있는 한도 금액이었다. 그조차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 일정 이자를 받고 폴 게티가 아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방식이었다. 아들을 구해야 했던 게일은 그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폴 게티에게는 혈육의 목숨이 걸린 이 비극적인 상황마저 자신의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현실과 비교하자면, 실제 당시 폴 게티에게 몸값을 부탁하고 돈을 빌린 주체는 아들이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폴 게티의 아들을 약물중독으로 의욕도, 능력도 잃어버린 소외적 인물로 배제하는 대신, 양육권이라는 장치와 함께 며느리에게 역할을 집중시키도록 이야기를 살짝 변형하며 메시지와 감정을 극대화한다.
영화 초반, 먹고 살기 위해 일자리를 부탁하러 게티 2세 가족이 폴 게티를 찾아간 날, 폴 게티는 훗날 납치를 당하는 손자에게 매우 값비싼 유물이라며 작은 인형을 선물한다. 게티 가의 사람이라면 응당 이런 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말과 함께. 아들의 몸값을 마련해야 했던 게일은 그 기억을 떠올려 유명 경매기관으로 아들의 인형을 들고 찾아가지만, 보통의 기념품일 뿐이라는 답변을 듣게 된다.
이전까지 폴 게티의 결정이 정말 그의 말처럼 ‘다른 가족마저 위험에 빠트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지 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진 관객들은 이 시점 이후 결국 모든 결정은 돈 때문이었음을 확신하게 된다.
게티 3세는 풀려났지만, 5개월 동안 납치당해 있던 충격으로 약물에 빠져 이후 비참한 삶을 살다 간다. 영화에서는 플레처 또한 손자의 생명마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폴 게티의 결정에 등을 돌리고, 결국 폴 게티도 숨을 거두는 순간 홀로 남게 된다.
돈이냐, 가족이냐 라는 유치한 질문은 자본주의 사회가 피할 수 없는 가치관의 딜레마를 상징한다. 영화 ‘올 더 머니’는 이를 가족의 생명이라는 무엇보다 당연한 가치를 끌어들이고 실화의 충격을 통해 신랄하게 표현함으로써 극단으로 끌어올린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