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형적으로는 이벤트 회사로 알려져 있는 MK ENT. 하지만 이곳의 진짜 정체는 바로 킬러들을 관리하는 회사다. 길복순은 MK ENT의 에이스로서 맡겨진 ‘작품’은 반드시 완수해내며 이 세계의 전설로 불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10대 딸 재영을 둔 싱글맘이기도 하다. 일에 있어서는 업계 최고를 자부하지만, 정작 그에게는 사춘기 딸과의 관계가 어렵기만 하다.
MK ENT.와의 계약 종료가 다가오는 시점에 복순은 MK 차민규 대표의 재계약 요청에도 즉답을 미루고, 작품을 끝낸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민규의 요청으로 새로운 작품에 투입된다.
복순은 촉망 받는 연습생 소녀 영지를 인턴으로 동반하고 작품을 진행하기 위해 현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TV에서 본 적 있던 타깃의 얼굴을 보고, 껄끄럽고 부당한 상황임을 인지한 복순은 차마 그를 살해하지 못하고 그가 잠들지 못해 미션을 실패했다며 거짓 보고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실패한 작품을 다른 요원들에게 맡기지 말 것을 MK와의 재계약 조건으로 내세운다.
그러던 중 복순의 딸 재영이 학교에서 한 남학생을 가위로 찌른 사건이 발생하는데, 학교로 불려간 복순은 재영과 피해 학생, 목격자이자 재영의 친구인 소라까지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음을 느끼고 딸과의 벽 앞에 마음 아파한다.
한편, MK의 임원이자 차 대표의 동생인 민희는 복순과 친밀한 관계이던 희성을 꼬드겨 복순이 포기한 작품을 마무리하고, 다른 킬러들에게 복순을 죽이면 업계 최고인 MK의 킬러로 스카웃하겠다고 제안한다. 그렇게 복순은 영지와 함께 킬러들과의 싸움에 돌입하고, 일부터 딸 재영과의 관계까지 더욱 복잡한 상황 속에 들어선다.
지난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영화 ‘길복순’의 줄거리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킹메이커’ 등을 연출하며 자신만의 스타일리시한 작품세계로 많은 마니아층을 거느린 변성현 감독의 작품으로, ‘칸의 여왕’으로 불리는 전도연이 주연을 맡고, 설경구, 이솜, 구교환 등이 함께 출현한 기대작이었다.
넷플릭스 공개 첫 주에 시청시간 전체 3위, 비영어 1위를 차지하고 누적 시청시간 5768만시간 이상을 기록하며, ‘오징어 게임’, ‘더 글로리’ 등 드라마에 비해 성과가 저조했던 영화 부문에서도 제법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평가는 변성현에 대한 기대감에 비해 다소 아쉬웠다는 얘기가 주를 이룬다.
이 영화는 사람을 죽이는 냉혹한 킬러의 세계와 홀로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으로서의 일상을 오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녀는 우리에게 낯선 세계인 킬러의 세계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꼽힌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의 세계에서는 아이와의 관계부터 미숙하고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어딘가 언밸런스한 설정은 영화의 독특한 색깔과 호기심을 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른바 설정의 힘이다.
가상의 스파이 세계를 만들어낸 킹스맨, 이 작품과 유사하게 규칙과 체계를 가진 하나의 세계로서 킬러들의 세계를 다룬 존윅 등과 같이 설정된 틀을 감독의 장점인 스타일리시한 연출과 화면으로 제법 그럴싸하고 멋지게 만들어낸다. 이는 영화의 흥미로운 컬러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약간의 엉뚱함을 버무리며 묘한 유머러스함까지 가져온다.
스타일리한 액션, 하지만 사실은 사랑이야기
사실 이런 잘 설정된 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꽤 혹평을 많이 받았다.
쿨한 킬러의 모습을 보이는 전도연의 연기는 마치 X세대 시절 통통 튀던 그녀만의 매력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며, 캐릭터성을 넘어 연기력 자체로 역시 훌륭한 수준이다. 액션 장면들은 기존 한국영화들에 비해 신선한 느낌이 있고, ‘역시 변성현’이라는 말이 자연스러울만큼 깔끔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스타일리시한 편이다.
그러나 세계관이 중요한 스토리에서 실질적으로 킬러들의 규칙이라든가 비즈니스가 돌아가는 방식, 각각의 회사와 킬러들의 관계 등 디테일한 설정에 탄탄함이 떨어진다. 스토리도 어딘가 핵심에 빠져들지 못하고 어수선한 느낌이 있다. 누군가는 장점으로 생각하는 액션 장면 역시 아쉬운 부분에 주목하는 이들도 많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사랑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업계 최고의 회사 MK의 수장 차민규는 복순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으로 냉철하게 그녀를 처분해야하는 시점에서도 흔들리고, 여러 킬러 조직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위치임에도 최고회의에서 폭주한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이전부터 복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동생이 간계를 펼치다 오히려 복순에게 목숨을 잃는 상황까지 초래한다. 결국 복순과 목숨을 건 결전을 벌이지만, 여기서도 충분히 그녀를 제압할 수 있는 실력자임에도 패배한다. 상식적으로 왜 그런 상항까지 가야했는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복순에 대한 차민규의 일방적인 감정은, 딸 재영을 향한 복순의 마음에서 유사하게 나타난다.
킬러로서의 삶에 익숙한 그녀가 다른 엄마들처럼 딸을 돌보는 것도 어렵고, 딸은 언젠가부터 자신에게 마음의 벽을 두는 듯 보인다. 그래서 딸을 향한 복순의 감정은 더욱 애절하고 간절하다.
그리고 두 모녀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딸이 안고 있는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복순이 세상의 편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응원하는 과정을 거치며 관계의 회복으로 들어선다.
이 두 가지의 사랑과 감정에 대한 이야기는 진심을 숨긴 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또는 어렵더라도 계속해서 진실과 진심에 다가가며 서서히 회복해가는, 관계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인간의 태도를 보여준다.
MK 대표라는 아이덴티티만을 충실히 보여주던 차민규. 사실은 딸과의 일상적 관계에서 복순이 겪었던 감정과 어려움을 그 역시 그대로 견뎌내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 상황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결론맺어지는 그들의 관계가 바로 화려하고 독특한 액션, 설정 속에서 이 작품이 말하는 진짜 메시지가 아닐까싶다.
사랑한다면, 솔직히 다가갈 것. 그 변하지 않는 진실을 회피한 이는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었고, 이 악물고 정면으로 마주한 이는 희망적인 관계의 진전과 자유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