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
대한민국을 뒤흔든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전국에는 계엄이 선포되고 계엄사령관으로 육군참모총장 정상호 대장이, 10.26 사태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합동수사본부장으로 국군보안사령관 전두광 소장이 임명된다.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광은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각 정부부처 차관들을 불러 모아 보고를 받는 등 월권을 자행하고, 청와대에서 나온 9억원을 국고에 귀속시켜야 하는 원칙을 어기고 개인적으로 유용한다.
전두광의 행보를 위험하게 본 정상호는 그에게 대로하며 3시간 단위로 합수부에 들어온 정보를 보고하라 명령하고, 전군 지휘관 회의에서 전두광의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겨냥한 경고를 날린다. 더불어 갑종장교 출신의 강직한 군인 이태신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직에 임명하고, 전두광, 그리고 전두광이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추천한 노태건은 좌천시킬 것을 국방부장관에 건의한다.
이후 전두광은 육사 시절부터 절친했던 노태건을 비롯해 하나회 선후배들을 모아 정상호를 10.26 사태에 연루된 인물로 체포할 계획을 세우고 끝내 실행에 옮긴다.
이에 이태신과 헌병감 김준엽 등은 반란군 진압에 소극적인 육군 수뇌부와 갈등을 빚으며 고군분투하지만, 군 전체 통신망을 장악, 모든 상황을 듣고 있는 반란군, 그리고 전 육군 곳곳에 퍼져 있는 하나회 인원들의 방해로 상황은 어렵게만 돌아간다.
‘서울의 봄’이라는 표현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과 함께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이후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신군부에 의해 저지되며 전두환 정권이 시작되기까지의 시간을 말한다.
비로소 독재정권이 끝나고 민주주의가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가 꽃 피던 희망의 그 시기를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에 빗대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이 그러했듯 서울의 봄 또한 짧은 시간에 끝나고 우리나라는 결국 신군부가 들어서며 새로운 독재정권을 맞게 됐다.
영화 ‘서울의 봄’은 이처럼 서울의 봄이 시작되고 저물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 되는 1979년의 12.12 쿠데타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과 대사는 실제 사건의 개요를 바탕으로 구성됐으며, 작중 인물명 또한 조금씩 실존 인물과 차이를 두며 픽션임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청문회 등을 통해 대중에게도 이미 널리 알려진 내용이기에 관람 중 스마트 워치의 심박수를 인증하는 스트레스 첼린지가 관객들 사이에 유행할 정도로 높은 몰입도와 실제 사건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영화를 보며 왜 '한산:용의 출현'이 떠오르는 걸까
개인적으로 '한산:용의 출현'을 늦게 보게 되면서 시기상 한산과 본 영화의 감상 시점이 겹치게 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두 영화를 비교해서 보게 됐는데, 더 큰 이유는 두 영화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의 태도와 선택, 그리고 메시지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영화 한산은 유교 철학 기반의 조선 시대 ‘불의’로 표현되는 왜의 침략에 맞선 ‘의’로 표현되는 군사와 민초들의 모습을 그린다. 대부분 인물은 국운의 위기 앞에 신분의 고하와 성별을 막론하고 목숨을 바쳐 싸운다.
반면 서울의 봄에서는 이태신과 김준엽, 정병주를 제외하고는 그런 지휘관을 찾기 힘들다.
육본의 수뇌부는 사태가 커질 것을 우려해 소극적으로 대응하다 반란군의 계획에 놀아나고 계속해서 책임 소재를 찾거나 회피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
전두광을 위시로 한 하나회 군인들은 육군참모총장이 하나회를 경계하자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해 아예 권력 장악에 나선다. 심지어 이들은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북한의 침입에 대비해야 하는 최전방 부대마저 서울로 진입시키는 등 오로지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모습을 보인다. 육본의 수뇌부들이 오판을 하고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것 또한 설마 그 정도까지 나올 줄은 몰랐던 탓이 크다.
거기에 이태신이 사방팔방 뛰어 다니고 전화 통화를 하며 설득한 수도권 인근 부대들은 전세가 반란군에 유리하게 돌아간다는 이유로, 상급 지휘관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하나둘씩 진압군 지원에서 발을 빼고 결국 이태신은 하나회 소속 부하 지휘관들의 예하 부대를 제외한 100여명의 인원만을 이끌고 전두광과 결전에 나선다.
나 자신의 영달과 안녕, 그 근원적 욕망의 승리
두 영화 인물들의 극명한 대비는 기본적으로 각각의 작품에서 다루는 메시지가 다른 것에 기인한다. 하지만 박정희의 5.16 쿠데타를 떠올리며 반란에 참여한 동료들을 독려하는 전두광을 보며 단순히 그뿐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처한 상황, 그리고 겪어온 사건들이 다르고, 그것이 곧 다른 세태를 만들어냈다. 한산이 다루는 그 시대의 인물들은 철저히 유교적 가치관 아래 살아왔고, 그들이 의라고 믿었던 그 가치는 목숨보다도 우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의 봄 속 인물들이 살아온 20세기는 40년의 국권 침탈 시기를 거쳐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건립된 국가임에도 군사 정변으로 만들어진 독재정권을 겪었다.
그 갑작스럽고 빠르게 몰아치는 격변의 시대를 겪으며 사람들은 국가, 주권의 정체성 인식에도 큰 변화를 겪었다. ‘국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든 이름, 형태가 변할 수 있음을 보았고, 그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며 현 시점의 권력에 충성하거나 아예 그 변화를 만들어 가는 이들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았다. 친일파, 사상의 변절, 동족상잔의 비극, 쿠데타, 부정선거 등 일련의 사건과 사람들의 모습이 그 안에 있었다. 조선시대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절대적인 가치가 변한 것이다.
영화 한산 속 인물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제 이 나라는 ‘의’가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한산 리뷰에서도 말했듯이 그 의가 반드시 이 시대의 의일 필요도 없고, 우리의 시대에는, 그리고 지금을 살고 있는 각자의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의가 있을 것이다.
그 지점은 분명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국가, 또는 민족의 공동체가 공유하던 가치는 잦아들고 개인의 안녕과 번영에 초점이 맞춰진 최근 백여 년 동안 우리의 시대를 마주하는 경험은 왠지 모를 씁쓸함을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광주 민주화 운동, 1987년 6월 항쟁 등을 거치며 국민들 스스로 불의를 물리치며 민주주의라는 이 나라의 가치를 이룩해왔다. 이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적 성과와 더불어 국민적인 정치 성숙도에 있어서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아프지만, 또한 자랑스러운 역사였다.
지금 우리나라는 이러한 자부심에 금이 가는 치명적인 사건을 마주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국민의 힘으로, 시민의 힘으로 불의에 맞서며 상처 입은 민주주의를 바로잡으려 하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분노가 현실에서 다시 살아나지 않기를, 영화 이후의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이 사회의 가치를 스스로 지키는 또 하나의 자랑스러운 기록을 남길 수 있기를 바라본다.
김성수, 황정민, 정우성...감탄과 확신과 발견
이 영화는 영화 자체의 매력도 충분하지만, 연기 구멍이 없는 것으로도 호평 일색이다. 그 중에서도 두 주인공 황정민과 정우성의 연기는 가히 그들의 인생 연기라 할만 하다.
전두환을 모티프로 한 ‘전두광’ 역의 황정민은 ‘조커’에 비견되는 신들린 악역 캐릭터 연기를 선보이며 관객들의 분노와 극찬을 한 몸에 받았다. 말 그대로, 분노유발자.
숨김 없는 권력욕, 선배들까지 휘어잡고 설득하며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결단을 밀어 붙이는 카리스마, 위기의 순간과 모든 것을 거머쥔 순간 보여준 광기는 '역시 황정민'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한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더욱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정우성이었다. 황정민은 전두환을 모티프로 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만큼 어느 정도 그려지는 아우라와 기대감이 있었다. 물론, 그것을 뛰어 넘을 정도로 놀라운 연기였지만 그것은 감탄과 경탄의 대상 정도였다.
그에 반해 정우성은 늘 그저 그런 정의로운 미중년 정우성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신념에 가득 차 있으며 어려운 싸움을 하는 외로운 인물이라는 점에서 영화 '헌트' 속 주인공과 크게 결이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정우성은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서울의 봄에서 내 눈에 들어온 그는 그 동안의 연기로 기억하던 정우성이 아닌, 그냥 이태신이라는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감탄과 경탄을 넘어, 배우와 영화의 진정성이자 반전 그 자체였다.
톤은 물론, 소리의 긁힘까지 연기하는 그의 목소리는 좌절하고 지친 장수의 심정과 심신의 상태를 고스란히 느끼게 하며, 모두가 만류하는 중에도 왜 그렇게까지 신념을 고수했는지 이태신이라는 캐릭터의 이유를 오롯이 납득하게 한다.
데뷔 30년이 다 되어가는 50대 중반의 배우를 보며 재발견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또 한 명 짚고 넘어가야할 인물. 김성수 감독이다.
'비트', '태양은 없다'로 90년대 청춘물의 한 획을 그었던 그는 2000년대 다소 활동이 뜸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2010년대 후반 '아수라'를 들고 나와 엄청난 내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후 나온 '서울의 봄'을 통해 그의 감독 인생 처음으로 천만영화를 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아마도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듯한 걸작을 완성했다.
90년대 청춘영화, 트렌디의 중심이었던 감독이 이제는 시대와 사회를 관통하는 작품을 그것도 엄청난 완성도로 만들어내는 거장의 반열에 올라서고 있는 것이다.
김성수 감독을 지금 확실한 거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적어도 거장으로서 행보에는 이미 접어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