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콤플렉스 29화(2부 14화)

동규 씨라고 부를게요(2)

by 이정석


“이제 손님도 저희밖에 없고, 요리할 일도 없으실 텐데 사장님도 같이 한 잔 하세요. 술 하신다면서요?”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말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일 장사 준비 때문에 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
“원래 장사 준비는 그날 그날 하시지 않아요?”
“뭐 그렇긴 한데, 오늘은 시간이 좀 남아서……. 시작한 김에 마저 마무리해야죠.”

다시 칼질을 시작하며 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물론, 여전히 미소와 친절한 목소리는 잊지 않았다.

“사장님이랑 성이는 안 지 얼마나 됐어요? 대충 듣긴 했지만.”
“생각보단 얼마 안 됐어요. 작년에 만났으니까 2년쯤 돼 가네요. 친해진 걸로 따지면 1년반 정도?”

그렇게 별 의미 없는 잡담이 오고 갔다. 일하는 중이긴 했지만, 딱히 중요하거나 어려운 일도 아니고, 일부러 다가와 준 사람을 굳이 밀어낼 정도로 불편한 것도 없었다. 본격적인 어울림이 아니라 가벼운 대화 정도라면 심심하게 당근을 썰면서 충분히 즐길만 했다. 그녀에 대해서는 그 선한 다섯 명의 무리 중에서도 특히 따뜻하고 좋은 사람 같다는 인상을 받고 있기도 했다.

“근데 사장님은 이름이 뭐예요?”
“김동규라고 해요.”

전에 가볍게 일러준 적이 있다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아, 김동규. 성이랑은 이미 말을 텄잖아요. 편하게 이름도 부르고. 그럼 사장님도 이름으로 불러도 돼요? 불편하면 말은 아직 안 놓을게요.”

말을 놓고 안 놓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게 우리의 관계였으니까. 우리는 말을 놓지 않는 사이라는 인식은 있지만, 말을 놓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말을 놓으면 어떻게 될까. 이런 것 따위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관계의 힘은 확실히 꽤 센 것 같다. 말을 놓는다, 안 놓는다는 화두를 떠올리는 상황이 되자 조금 낯설고 가벼운 불편함이 일었다. 일단 말을 놓지는 않겠다는 말이, 그래서 좀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네, 편하신 대로 하세요. 괜찮아요.”
“그래요? 그럼, 앞으로 동규 씨라고 부를게요.”

지영은 그 말과 함께 일행이 있는 테이블 쪽을 돌아봤다. 그러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고, 살짝 눈짓해 보였다.

“그럼 전 다시 가볼게요.”

그녀가 자리로 돌아가고, 나는 남은 당근을 썰었다. 오늘은 오이도 마저 썰어버릴까. 그냥 왠지 모르게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음날, 마감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각, 지영이 혼자 가게를 찾아왔다. 여느 때와 같이 화장을 하고 외출을 위해 차려 입은 복장은 아니었다. 핑크색 면 티셔츠와 잠옷에 가까워 보이는 칠 부 바지를 입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안경도 쓰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 바로 그녀인줄 알아보지 못하고 ‘동규 씨’라는 소리에 잠시 머뭇했다.

그들은 1, 2주에 한 번 정도 간격으로 포장마차를 찾았다. 이틀을 연달아, 그것도 혼자 온 건 처음이었다.

“아, 아 네, 안녕하세요? 오늘은 혼자 오셨어요?”

머뭇한 게 민망해서인지 나도 모르게 톤이 높아졌다. 마침 남은 손님들이 우르르 한 번에 빠져나가느라 테이블 정리에 한창이던 성이가 뒤늦게 나타났다.

“엥? 뭐야, 이 차림은?”
“왜? 추레하냐?”
“에이, 뭘 또 추레할 것까지야. 그냥 잠깐 놀란 것뿐이지. 이 시간에 혼자 웬일이야?”
“리포트 쓰다가 배가 고파서. 오늘따라 혼자 먹기도 싫고 그래서 국수나 먹을까 하고 왔어. 혼자도 괜찮죠?”

지영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팔아주는 손님 오시는데 여럿이면 어떻고 혼자면 어떻냐. 편하게 앉으세요. 여기 주방 앞에 앉을래? 혼자 먹기 심심할 텐데.”

성이가 대신 답하고, 나는 말없이 웃었다. 그리고 바로 육수를 데우고 국수를 삶기 위해 화구에 불을 붙였다.

“술도 드실 건가요?”
“네.”

대답은 지금 막 들었지만, 내 손은 당연하다는 듯 오이와 당근을 접시에 담고 냉장고에서 그들이 늘 먹던 참이슬 한 병을 꺼내오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 시마이할까? 다른 테이블도 다 빠졌고.”

성이가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이는 익숙한 듯 본인이 앉을 자리의 의자를 빼고, 소주잔 하나를 그 앞에 놓고 나서야 다른 테이블들을 정리하러 떠났다.

나는 성이가 걷어온 빈 그릇들을 정리하며 틈틈이 국수가 삶아지는 상황을 살폈다. 나무젓가락과 위생비닐을 덮은 일회용 접시들을 쓰느라 설거지 거리는 많지 않았다. 접시의 비닐을 벗겨 일회용 접시들을 차곡차곡 모으고, 나무젓가락은 쓰레기봉투에 몰아넣었다. 조리 도구들과 간단하게 숟가락 정도만 설거지 하면 될 것 같았다.

“학교가 가까우신가 봐요? 도서관에 있다 나오신 거예요?”

그 사이 완성된 국수를 지영의 테이블 위에 올리며 물었다. 별 의미는 없고, 익숙한 손님에게 하는 인사 정도의 얘기였다. 리포트라는 단어를 듣자, ‘우리들의 천국’ 같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대학생들이 도서관에서 밤새는 장면이 떠올랐다.

“아니요. 집에서 리포트 쓰다 나온 거예요. 설마 이러고 학교에 있었겠어요?”

지영이 가볍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아, 당연히 도서관도 학교 안에 있는 거잖아. 평소에 만날 화장하고 옷 차려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도서관에서 밤새운다고 이렇게 다니진 않을 텐데. 갑자기 별의 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지영이 쓴 ‘설마’라는 단어는 분명 유머러스하고 가벼운 농담 같은 뉘앙스를 하고 있었지만, 내게는 그런 뉘앙스도 순간 와 닿지 않았다.

“아, 죄송해요.”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순간 지영의 표정에 스치는 당혹스러움을 읽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아무 의미 없는 말이 어떤 실수를 담고 있을지 잠시 고민했을는지도 몰랐다.

“학교는 멀진 않은데 지하철로 몇 정거장 정도 돼요. 제가 원래 대전에서 살다 서울로 대학 오면서 자취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 근처 살아요. 같이 오는 친구들도 다들 집 방향이 비슷해서 같이 집에 가다 친해진 것도 있고요.”

지영은 내 죄송하다는 말에 반응하는 대신 앞선 질문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어색한 상황을 비껴갔다. 그들이 착한 무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문득 그의 대응에서 흔히 말하는 ‘사려 깊다’라는 단어의 의미가 느껴지는 듯했다.

특히 그녀는 말을 시작하면서, 그리고 말 하는 중간중간 잊지 않고 열심히 젓가락을 놀 잔치국수를 먹었다. 그녀의 그 일상적인 동작은 우리의 대화를 예기치 못한 순간의 감정과 상관없이 술집 사장과 손님 사이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이끌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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