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차가 갖고 싶어(3)
시간은 흘러, 마침내 패리의 입대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할 만하겠냐?”
영업을 마치고, 패리는 우리에게 물었다. 입대 바로 전날임에도 그는 포장마차를 찾았다.
포장마차 안에 줄지어 붙어있는 백열전구를 모두 끄고 하나만 남겼다. 그렇게 우리가 앉은 테이블 주위로만 스포트라이트처럼 빛이 떨어졌다. 세계와 단절된 작은 세계 속에, 또 하나의 작은 세계가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구 위의 별은 그 세계까지 닿지 못했다.
섣불리 네, 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나와 성이는 오이를 씹었다. 썰어놓은 지 오래된 오이는 물컹하게 씹히며 단물을 뱉었다. 고추장을 찍지 않은 오이의 맛은 싱거웠다.
“왜 말들이 없냐?”
패리가 웃으며 물었다. 어색한 웃음이었다. 어떤 표정이든 단조로운 그의 얼굴은 거짓말을 잘 못했다. 그런 웃음을 보게 된다면, 누구든 섣불리 네, 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섣불리’라는 말은 그의 묻는 답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그날 밤이라는 시점에 관한 얘기다.
“잘할 거라고 믿는다. 믿지만, 부탁할게. 잘 지켜줘. 2년도 못 채우고 그만두지만, 그래도 내가 정말 열심히 키운 가게야. 휴가 나왔을 때 이전만 못하다 싶으면, 나 화낼 거다.”
패리가 다시 웃었다. 그렇게 웃지 좀 말아요, 라는 말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런 게 보기 좋을 리 없잖아요. 오이를 씹는 이빨의 움직임이 그런 말을 발음할 때의 움직임처럼 느껴졌다.
“알았어.”
성이가 최대한의 성의를 보여 대답했다. 침울한 목소리였지만, 짧아서 많이 티가 나지는 않았다.
“내일 들어가는데 지금 이렇게 있어도 돼? 푹 자야 하는 거 아니야?”
목소리를 가다듬듯 한참 입 안에서 잘근잘근 씹힌 오이를 꿀떡꿀떡 두 번으로 나눠 목으로 넘기고, 성이가 말을 이었다. 말을 마친 녀석은 다시 새끼손가락만 한 오이 조각을 입 안에 쑤셔 넣었다. 녀석의 입술은 늘 오물오물하는 듯한 느낌이어서 그걸 다 집어넣을 수 있을까 잠깐 걱정스러웠다. 장하게도, 녀석은 집게손가락으로 눌러 끝까지 오이를 입안에 밀어 넣었다.
“어디 먼 데 가냐? 의정부 가는데 끽해야 몇 시간이나 걸린다고. 걱정하지 마.”
패리가 말했다. 그리고 다시 침묵. 포장마차 밖에서는 밤이 늦었는데도 여러 가지 소리가 뒤섞여 어수선했다. 시끄럽지는 않았지만, 간헐적으로 주인도, 시작점도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이곳은 그냥 침묵. 유리창 밖의 풍경처럼 바깥의 소리와 우리 사이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졌다. 이 작은 세계와 저 바깥의 세계는 단절되어 있었다.
“고마웠어요.”
나는 말했다. 내 목소리는 마치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처럼 무겁게 들렸다. 퉁, 무언가가 갑자기 앞에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으로 먼 곳에서 들려오는 취객의 거친 소리를 눌렀다.
빈터에 갑작스럽게 굴러들어와 그곳의 모든 게 되어버린 축구공을 떠올리며, 나는 느꼈다. 무겁다. 무겁다. 그러다 느낌은 생각으로 바뀌었다. 무겁다. 무겁다. 무거움을 상기시키기 위했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런 셈이 되었다.
그러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타이밍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말 자체의 무게감이 그냥 이 정도인 것은 아닐까. 다른 이야기와 설명을 동반하지 않고 홀로 떨어져 나온 그 한마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그 한마디 - 그 안에 말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말로 할 수 없는 어떤 것까지 모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그 말은 크고 위대한 것이었으니까. ‘고맙다’라는 말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실이 고마웠다.
“고맙기는 무슨.”
“진심이에요.”
정말, 진심이었다. 그 무게감까지. 신세라고 해봐야 연습실 키를 빌려주거나 복사해준 것뿐이었지만, 딱히 은혜라고 할 만한 도움을 받은 적도 없지만, 그런 게 없이도 나는 그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약간은, 외로워서가 아니라 살고 싶어서 나를 찾아온 성이가 나와 친구가 되던 날 말했던 ‘고맙다’와 비슷한 감정이었던 것도 같다.
진심이라는 말에, 패리는 웃었다. 멋쩍어 보이긴 했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래요. 그건 좀 낫군요. 나도 웃을 수 있었다. 성이는, 잘 모르겠다. 대놓고 울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울먹였던 것도 같다.
제육볶음과, 홍합탕과, 생오이를 한 접시씩 놓고, 그날 밤, 우리는 소주 한 병으로 두어 시간 정도를 보냈다. 내내 대화는 그런 식이었고, 제육볶음과 홍합탕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채 오이만 씹고, 또 씹었다. 백일휴가 때 보자는 말과 함께, 패리는 먼저 자리를 떴다. 나와 성이는 패리를 보내고, 소주를 한 병쯤 더 마실까 하다가 그냥 자리를 정리했다. 한잔씩 받긴 했는데, 아무도 건들지 않았다.
패리가 떠난 뒤에도 장사는 잘 됐다. 단골손님들은 한 명도 줄지 않고 가게를 찾아주었다.
가끔 패리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있었고, 우리는 패리가 보낸 편지를 근거로 늘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해주었다. 의외로 단체생활이라는 것도 할 만하더라. 편지에 쓰인 그 한 문장이 모두를 안심할 수 있게 해주었다.
패리가 거론될 때마다 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보고 싶다는 말이 튀어나오거나 더러는 말이 없어지는 경우도 생기고, 이미 계산을 끝내놓고 갑작스럽게 소주 한 병을 더 시키는 사람도 있었다.
패리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나는 종종 그런 그의 재주에 감탄했다. 사석에서는 그렇게 무심하고, 만사 귀찮아 보이는 사람이 여기서는 어쩜 이렇게 사교적이고 말이 많은 사내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간단해. 기타를 치고, 드럼을 치듯이 장사를 한 거지. 여기 참 많이 좋아했잖아.”
쓱쓱, 행주로 테이블을 훔치며, 성이는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기타나 밴드의 세계에 대해 아는 바 없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긴 했지만, 녀석의 표정을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는 했다.
패리의 영향력이 남아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좋은 일이기도 했고, 어떤 면에서는 나쁜 일이기도 했다. 매상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참 좋은 일이었다. 손님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그러나 이 가게가 완전히 내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좀 문제였다. 아무리 좋게 봐도 나는 아르바이트생 정도 같은 느낌이었다. 성이는 달랐다. 녀석은 확실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패리의 영향력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갔다. 성이의 노래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자칭 팬클럽이라며 올 때마다 인사를 잊지 않는 무리도 몇 있었다. 첫날처럼 주는 술 다 받아먹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말 친한 손님하고는 노래가 끝나면 종종 술잔을 나누기도 했다.
나쁠 건 없었다. 애초에 내가 바란 건 그냥 성이와 같이 일하면서 별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는 것 정도였으니까. 성이와 패리 덕에 장사가 더 잘 되면 내 몫으로 떨어지는 것도 많아지니 당연히 더 좋은 일이고.
손님들도 나한테 꼬박꼬박 사장님 호칭을 붙여주긴 했다. 성이가 조리 실력이 떨어져서 주방에서의 권한은 내가 더 크기도 했다. 그런데 뭔가가 허전했다.
그가 떠난 뒤에도 여전한 패리의 영향력과 점점 커지는 성이의 영향력을 느끼면서, 불쑥 두 사람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내가 이곳에 오면서 기대했던 것들이 아무 문제 없이 충족되고 있는데, 왠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