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콤플렉스 28화(2부 13화)

동규 씨라고 부를게요(1)

by 이정석

또각, 또각, 또각. 차분히, 너무 서두르지 않으려 노력하며 당근을 썰었다. 원래 기본 안주로 나가는 오이와 당근은 영업 전 준비 때 써는 게 원칙이었다. 채소는 신선할수록 좋고, 포장마차는 영업이 끝나면 자리를 떠나야 하므로 냉장고를 돌릴 수 없었다.


일부러 당근과 오이를 썰어 집에 가져가 냉장고에 보관하고 다음 날 다시 꺼내오는 수고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조금 빨리 와서 써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가끔 나는 마감을 조금 앞두고 한가해지면 당근을 썰었다. 성이의 늦은 손님들이 찾아왔을 때다.


“사회 시간에 배우잖아. 저기 어디 원주민은 남자가 화장을 하고 몸짓을 조심하는 곳도 있고, 어딘가는 여자들이 사냥과 전투를 하며 용맹함을 뽐내는 곳도 있다고. 남자다운 것, 여자다운 것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게 아니라, 그 사회의 문화를 학습하는 것뿐이라고. 그러니까 내 말은, 사람들이 보기에 여성스럽다고 해서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성 정체성을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중요한 건 내가 성적으로 남자를 사랑하는가, 여자를 사랑하는가 하는 문제지.”


성이의 높아진 목소리가 주방까지 들려왔다. 내가 알던 녀석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성이는 달라졌다. 목소리가 커졌고, 손님들을 대하는 태도도 점점 적극적으로 변했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훨씬 자연스러워지고 가끔은 쇼맨십 같은 게 엿보이기도 했다. 힘 주어 기타를 움켜잡고 눈을 질끈 감으며 긴장하던 소년의 모습은 없었다.


성이를 찾는 손님들은 여러 무리가 있었다. 다들 스스로 팬클럽이라 칭한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연령대도, 성별도, 태도도 다 달랐다. 어떤 이는 노래를 좋아해서, 어떤 이는 성이의 연주와 노래가 갖는 독특한 매력이 좋아서, 또 어떤 이는 그런 노래와 술이 함께하는 공간을 만든 것에 대한 경의로 성이를 좋아했다. 40대를 넘긴듯 보이는 중년의 사내도 있었고, 같은 회사 동료들로 보이는 30대 정도의 남성 무리도 있었고, 우리 또래의 놀기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성이는 그중에서도 우리와 동갑내기인 5명의 무리를 가장 좋아했다. 그 무리는 대학 동기인 남자 셋과 여자 둘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1학년, 한참 대학 생활에 빠져 지낼 새내기들이었다.

처음에는 성이가 그들에게 보인 관심이 대학생에 대한 동경 같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자격지심인지 모르겠지만, 홀과 주방을 드나들며 우연히 흘려듣는 이야기들은 뭔가 나와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성이도 별반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녀석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에게 대학 생활에 대해 궁금한 걸 묻고, 언젠가는 스스로 돈을 모아 실용음악 전공으로 대학에 갈 거라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그들은 다소 소란스러웠지만, 선량하고 마음이 열려 있었다. 어쩌면 내가 처음 만났을 당시의 연약한 성이였더라도 충분히 함께해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사람들. 시간이 좀 흐르고 보니 성이는 대학생에 대한 동경 같은 게 아니라 그냥 그런 그들의 선하고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다.


성이와 그들은 그렇게 금세 친구가 됐다. 어느 순간부터 성이는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녹아들어 수다를 떨었고, 그런 시간을 즐기기 위해서인지 그들도 일부러 마감할 즈음인 새벽, 거의 마지막 차수로 우리 포장마차를 찾았다. 성이가 장사에 방해받지 않고 그들과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들이 자리한 곳 외에 다른 테이블은 모두 비었다. 아예 의자를 정리하고, 파라솔 테이블을 접은 지 오래였다. 마감 시간을 조금 넘긴 뒤였지만, 성이와 그들은 마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나는 일부러 천천히 주방을 정리했다.


성이와 그들은 반말을 주고 받고 스스럼없이 어깨에 손을 올리는 친구 사이였지만, 나는 아직 그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내게는 친구가 필요할 이유도, 그들과 공유할 이야기나 관심사도 없었다. 그저 포장마차 일에 몰두하고 빈 시간은 혼자 보내는 게 편했다.

성이와 친구가 되면서 그들은 당연히 나와도 친구가 될 것으로 생각한 듯했다. 먼저 말을 걸어오고, 이름을 물었다. 그러나 조용하고, 가까이 다가와도 조심히 밀어내는 듯한 거리감에 그들은 그 이상 내게 다가오지 못했다. 가게에서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었다. 종종 악수를 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도였다. 나는 주방으로 들어가고, 이후로는 성이가 그들을 맞았다.


이름을 물은 적은 있지만, 그들은 보통 나를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이름이 쓰일 기회가 없었으므로, 그들은 이내 내 이름은 잊은 듯했다. 성이와 나는 공동 사장이었지만, 누군가는 성이로, 누군가는 사장님으로 불렸다. 어차피 다 같이 어울릴 상황도 좀처럼 없다보니 그런 관계의 차이와 적당한 거리감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좋은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그들을 위해 조금 더 신경 써서 안주를 준비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관계였다.


별명이 마루타라고, 성이가 그랬는지 내가 말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어쨌든 누군가 그들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도 나를 마루타로 부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마루타라는 단어가 갖는 이미지와 선입견을 생각하면, 이 정도 관계에서 스스럼없는 호칭이 되기에는 다소 불친절하고 무거운 감이 있었다.


성이는 그들과의 술자리에서 자주 자신의 여성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에피소드와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들은 그때그때 달랐지만, 핵심 내용은 늘 비슷했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콤플렉스를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방식으로 조금씩 극복해갔다.


포장마차에서 노래를 하며 느끼는 희열과 사람들의 호의적인 반응이 녀석이 각성하는 계기가 됐다면, 이후에는 이들과 어울리며 실체적으로 자신의 콤플렉스를 드러내고 치유해갔다. 누구도, 패리와 나조차 해주지 못했던 것을 그들이 성이에게 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고마웠다. 나의 소중한 친구가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데 큰 도움을 줬고, 매번 반복되는 주제가 지겨울 법도 한데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해 줬다. 내가 그들과 거리를 둔 까닭은, 어쩌면 새로운 관계 맺음에 대한 부담과 불편함보다 그들과의 의미 있는 시간이 온전히 성이의 것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을는지도 몰랐다.


흥분한 성이의 목소리에 잠시 테이블을 건너보다 다시 도마로 시선을 내렸다. 또각, 또각, 또각. 녀석, 오늘 좀 취했나 보네, 생각하며 마저 남은 당근을 썰었다.


또각, 또각, 또각. 그때 또 다른 ‘또각’ 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또또각, 또또, 각각, 또각……. 문자로 표현하면 비슷한 느낌이지만, 다소 다른 질감과 박자의 두 가지 또각거리는 소리가 뒤섞였다.


그 이질감이 느껴지는 소리를 따라 다시 시선을 옮겼다. 하이힐을 신은 한 여자의 발이 눈에 들어왔다. 성이와 함께하던 ‘그들’ 중 한 명인 지영이라는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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