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차가 갖고 싶어(2)
패리는 11시가 조금 넘자 나와 성이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다음 날도 출근해야 했고, 성이는 취해서 더 있어 봐야 도움 될 게 없었다.
30분 정도 자고 일어났지만, 성이의 취기는 쉬 가시지 않았다. 계속해서 실실거리는 소리를 흘리며 웃었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봤냐?”
그러다 괜히 길가의 가로수 하나에 기대서더니 내게 물었다. 나는 말없이 웃어주었다. 녀석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가득했고, 그 모습이 나는 보기 좋았다.
“대단했어.”
웃다가, 나는 말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고, 그런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웠다. 기타를 메고도 한참을 움츠려있던 성이는 거기 없었다. 그는 빛을 부숴버릴 만큼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Delight의 남자였다.
“나 조금 자신감 같은 게 생겼어. 이곳에서라면 잘 할 수 있을 거 같아.”
가로수에 등을 기댄 채로 녀석은 옆으로 미끄러져 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라고 느껴질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가로수에서 떨어져 나왔다. 유유히, 구름이 많은 밤하늘 아래에서 성이는 구름처럼 슬슬 길 위를 걸었다.
“너는 꿈이 뭐야?”
걷다가 다시 멈춰 선 성이가 불쑥 뒤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나는 잠깐 생각했다. 나한테도 꿈이라는 게 있을까.
“글쎄……”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 말 뒤에도 나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나한테는 정말 꿈이라는 게 없는 걸까.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억울했다.
“나는 기타를 치고 싶었어. 리더 형 말대로 그냥 치고 싶었고, 기왕이면 더 잘 치고 싶었고, 사람들이 들어주면 더 좋겠고. 그냥 그게 다였어. 한 번도 그게 꿈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어. 꿈은 뭔가 거창하고 확실한 게 아닐까 생각했지. 근데 오늘 그런 생각이 드네. 내가 가끔 이랬으면 좋겠다, 싶던 뭔가에 가깝게 가니까, 갑자기, 이런 게 꿈은 아닐까, 난 늘 이런 걸 그리고 꿈꿔왔던 건 아닐까. 넌 그런 거 없어? 그냥 원하는 거, 하고 싶은 거.”
술을 급하게 먹어서인지 성이 녀석이 말을 할 때마다 유난히 역한 숨이 느껴졌다. 잠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산소가 풍부한 지상의 공기가 왠지 유난히도 천천히 몸 안을 돌아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거야. 내가 원하는 건 '천천히' 라는 느낌으로 숨을 쉴 수 있는 것. 편안한 마음으로, 무언가에 쫓기거나 강요당하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 것. 그냥 나를 둘러싼 모든 불안 요소들이 사라져만 준다면, 그 순간 나는 꿈을 이루는 게 아닐까.
“그냥, 숨 쉬고 사는 거. 되도록 편하게. 그게 내 꿈이야.”
고개를 들면서 나는 말했다. 그리고 웃었다. 씩. 소리 없이 편안하게, 한 사람의 몸 안을 도는 편안한 공기처럼.
“참 재미없게 산다. 그럼 갖고 싶은 건? 이제 너도 곧 사장님인데, 그래도 여기서 뭐 하나라도 건져야 할 거 아니야?”
성이는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필요한 것을 채워가고 싶을 뿐, 갖고 싶은 것을 찾으려는 건 아닌데. 그래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씩. 이번에도 소리 없이 웃으며. 무거웠다. 소리 없이 웃는 것조차 무겁게 느껴질 만큼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밤이었다. 엷게 띤 미소가 무거워 가만히 밤공기에 흘려보내지지 못했다. 어색했다. 씩, 그만큼의 감정은 이미 지나갔는데 얼굴에서 쉬 벗겨지지 않는 미소가 어색했다.
그때, 갑자기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미소의 무게가 마음을 자극할 때, 갑자기 뭔가가 하나 갖고 싶다고 느껴졌다.
“빨간 차. 크기 같은 건 상관없어. 차종도 상관없고. 그냥 색깔만 빨간색이고, 달릴 수만 있으면 돼. 아주 빠를 필요도 없어. 어차피 어떤 차든 나보다는 빨리 달리겠지. 그냥 그런 게 하나 갖고 싶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면허도 없고, 평소 차에 관심도 없는 내가 왜 빨간 차를 떠올린 걸까. 모르겠지만, 굳이 갖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이면 좋은 걸로 하자. 스포츠카 같은 거 어때? 돈 많이 벌어서 네 말대로 편하게 살고, 차도 몰고. 빨간 차, 내가 꼭 사게 해줄게.”
성이가 웃으며 말했다. 여름에 다가섰는데도 그 밤은 찬 바람이 불어, 녀석의 볼에 붉게 달아오른 자국이 유난히 선명해 보였다.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조리장도, 영양사도, 이모들도, 본사 사람들도 무척이나 아쉽다고 말했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 사람이 구해질 때까지는 일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덧붙이자, 몇 명은 여전한 표정을 지었고, 어떤 이들은 그래, 라고 말해주었다.
그런 식이었다. 누구도 곤란하지 않아서 큰일은 아니었고, 더러는 서운해했지만 내가 없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는 분위기였다. 두 달의 시간을 준 패리에게 감사했다. 어쨌든 아무도 곤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성이는 그날 이후로 매일 가게에 나갔다. 아, 패리는 일요일은 쉬자는 주의였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매일은 아니었다.
나는 급식실에 새로운 사람이 오기까지 처음 몇 주 동안은 이틀에 한 번꼴로 가게에 나갔고, 보통은 두어 시간 정도만 일을 도우며 패리의 노하우를 전수 받았다. 별건 없었다. 빠르고, 적당히 맛있게 요리하는 방법. 그게 패리의 노하우의 핵심이었다. 숙달이 필요할 것도 없었고, 약간의 요령만 익히면 되는 것이었다. 남은 두 달의 시간을 다 들이부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일이 패리 스타일대로 손에 익은 뒤에도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가게에 나갔다. 급식실 일을 그만둔 뒤에는 매일 나갔다. 그곳에 빨리 익숙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러 갔을 때와는 확실히 다른 그곳의 공기에 몸을 적응시키고, 효율적인 일 처리를 위한 동선을 익히고, 참 자주도 들러주시는 단골손님들과 안면을 터야 했다. 그런 것은 조리 기술을 익히는 것에 비해 확실히 많은 수고가 필요한 일이었다.
패리는 조금씩 가게 주인으로서 지위를 우리에게 넘겨주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술을 들여오게 했고, 성이와 같이 시장에 가서 장을 봤다. 거래처 사람들을 소개해줬고, 자릿세의 개념을 설명해줬다. 자릿세라고 하기에 등에 문신을 새긴 건달들을 떠올렸지만, 실제로 그런 건 없었다. 근처의 상가번영회에 달마다 얼마씩 지급하는 개념이었다. 포장마차로 인해 생기는 상가의 손해를 일정 부분 보상해주는 차원이라고 했다.
장사는 잘되는 편이었다. 패리 혼자 벌던 것을 두 사람이 나눠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내심 불안하기도 했는데, 엄청 큰돈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급식실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더 벌 수 있었다. 패리가 단골 관리를 잘한 덕도 있었고, 성이의 노래가 반응이 좋아 매상이 조금 오른 덕도 있었다.
패리는 입대 전까지 우리에게 단골들을 확실히 인계해줬다. 한 명, 한 명 인사를 시켜주었고, 그 많은 손님의 취향을 우리가 다 기억할 때까지 몇 번이고 일러줬다. 우리는 쉽게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고, 쉽게 그들과 친해졌다. 게 중에는 버릇이 나쁜 손님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좀 알고 나니까 아예 통제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왜 두 달이나 남겨놓고 가게에 나오라고 했는지 알겠냐? 언젠가 패리가 물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계산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받는 것뿐만 아니라 주는 것에서도. 그게 깔끔한 패리 식 계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