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기회(3)
두 번째 조건은 의외였다. 성이의 눈에서 빛이 났다. 그러다, 흔들렸다. 그 빛이나 흔들림은 생기 같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노기에 가까웠다.
“왜?”
성이가 짧게 물었다. 한 음절에 불과한 소리가 제법 날카로웠다. 성이의 목소리에서 날카롭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밴드는 싫다며? 그럼 여기서 기타 치면 되잖아. 여기서 노래하면 되잖아.”
“나 이제 기타 안 쳐.”
“왜?”
“하고 싶지 않아.”
“하고 싶지 않아? 글쎄. 그런 놈이 우리하고 있을 때는 왜 기타치고 노래하냐? 그냥 겁나서 아닌가?”
패리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평소 그의 얼굴은 차갑고, 무표정해보이긴 해도 심각해보이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여름의 더운 기운을 가득 머금은 바람이 스멀스멀 포장마차 안을 기어 다니는 듯 천천히 주변 공기가 달아올라, 더웠다.
“나는 네가 뭘 겁내는지 알 것 같다. 근데 왜 겁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네가 원하는 게 그렇게 시도하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로 거창한 거였냐? 성아, 꿈이라는 건 말이야, 네가 되고 싶은 걸 말하는 게 아니야. 네가 그 무엇이 돼서 결국에 하고 싶은 거, 그게 꿈이야. 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는 것이 중요한 거라고.
어떤 사람은 그냥 하는 것보다 뭔가 되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어. 근데 그런 사람은 그것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 것뿐이야. 넌 그게 아니었잖아. 그냥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고 싶은 거고, 기왕이면 잘 하면 좋고, 사람들이 들어주면 더 좋고, 그냥 그거 아니었어? 왜 그것조차 무서워서 안 하려고해?”
마저 말을 이은 패리는 직접 빈 잔을 채워 소주를 들이켰다. 성이는 대답이 없었다. 확실히 더운 바람이 포장마차 안을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녀석의 이마에는 몇 방울, 땀이 고였고, 패리의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다.
“여기서는 네가 어떤 노래를 불러도 뭐라고 할 사람 없어. 이게 네가 꿈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어. 잘 생각해.”
누군가 소주 한 병을 외치는 소리에 패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패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성이도 곧장 몸을 일으켰다.
“가자.”
녀석은 내 얼굴도 보지 않은 채 그렇게 말하며 포장마차를 나섰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녀석을 따라나서며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손님에게 소주를 주고 돌아서다 나와 눈이 마주친 패리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생각하냐?”
아직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위에서 성이는 물었다. 두 발짝 정도 내게 앞서 걸으며 녀석은 담배를 꺼내 물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을 타고 녀석이 뿜어낸 담배연기기 내 쪽으로 흘러왔다. 매캐하고 쌉싸래한 향이 코끝을 스쳐갔다.
“어디 가서 한 잔 더 할래?”
녀석의 뒤에서, 대답대신 나는 물었다.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이와 나는 가까운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노가리와 생맥주를 시키고, 녀석은 다시 담배를 물었다.
“솔직히 사람들 앞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기타를 칠 자신이 없어. 다들 이상하게 볼 테니까. 그렇다고 하기 싫은 노래 억지로 부르는 건 더 내키지 않고.”
“왜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거라고만 생각해? 너 노래 잘 하잖아.”
“뭘 하든 여태까지 다른 사람들한테 좋은 소리 들어본 적이 없어. 나한테 칭찬을 해 주거나 내가 뭔가를 해서 좋아해준 사람은 너랑 형이랑 누나가 전부야.”
손님이 별로 없는 탓인지 종업원은 주문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성이의 앞에 생맥주 한 잔 씩을 내려놓았다. 성이는 녀석 특유의 소극적인 품새로 맥주를 한 모금씩 홀짝였다. 무겁게, 빛을 잃은 눈과 더불어 그 모습은 참 측은해보이기까지 했다. 조금 전의 노기 어린 눈빛 따위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형은 날 잘 알아. 내가 밴드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 형한테 엄청난 능력이 있어서 형만 따라가면 어떻게 되겠지 싶었던 것도 아니었고, 형이 기타를 정말 잘 쳐서 계속 따라다니다 보면 나도 잘 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도 아니었어. 그냥 형만큼 날 잘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형이 하는 말이라면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정말 싫어. 무서워. 근데 형의 마지막 말이 걸려.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말. 이상하게 나에 관한 말이라면 형이 하는 말은 다 진짜 그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기본안주로 나온 뻥튀기가 눅눅했다. 이와 이 사이에서 부서지지 못하고 그저 짓눌릴 뿐인 뻥튀기를 씹는데 문득 성이 녀석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단하고 생기 있는 모습을 잃어버리고 주어진 압력에 찌부러지고 일그러지는 모양이 그랬다.
“그렇게 널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네가 믿는 사람이라면, 이번에도 한 번 믿어봐. 일단 해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다시 물러나면 되잖아.”
패리가 이야기한 마지막 기회가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이 오래된 뻥튀기 같은 녀석에게 의지를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패리뿐이었다. 그가 군대를 가버리면, 그리고 그가 제대할 무렵 성이가 또 군대를 가버리면,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패리도, 성이도 지금과 같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냥 물러나면 되는 게 아니야. 여기서 실패하면, 난 아마 상처 입을 거야. 리더 형이 마지막이라는 말까지 했으니까, 정말 크게 상처 입을 거야.”
두 손으로 잔을 들고 맥주를 홀짝이며 녀석이 나직이 말했다. 녀석의 얼굴은 온통 ‘상처’라는 단어로 뒤덮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겁고, 불안하고, 슬픈 느낌이 영락없이 그 단어의 분위기였다. 당장 녀석에게서 그 불길한 기운을 걷어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일단 해봐. 내일부터 노래하랬잖아. 며칠 해보다 정말 아니다 싶으면 그만 둬. 그쯤 되면 패리도 너한테 억지로 노래하라고 안 하겠지. 그냥 가게만 넘기고 말 거야. 네가 패리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적어도 둘 중에 하나는 얻는 거야. 그냥 거절하면 하나도 못 얻는 거고. 상처고 뭐고 생각할 필요 없어. 그냥 간단한 계약이라고 생각하면 돼. 하나라도 얻는 게 어디냐?”
노가리가 나왔다. 나는 말을 마치며 노가리 하나를 들어 머리부터 씹기 시작했다. 성이도 곧 노가리를 하나 들어 천천히 끝을 씹었다. 그러면서, 노가리를 씹느라 계속해서 움직이는 이빨 사이로 뭐라고 짧은 말을 뱉었다. 짧기만 한 게 아니라, 작고 여린 소리이기도 해서 나는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뭐?”
내가 물었다. 그러나 성이는 입안의 노가리만 씹어댈 뿐 말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입 안의 노가리를 씹어 목구멍으로 넘겼을 때에야 손에 들고 있던 반만 남은 노가리를 접시 위에 내려놓으며 녀석은 입은 열었다.
“할까……라고 했어.”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일종의 안도 같은 거였다. 녀석의 대답을 기다리느라 잠시 입안에 담고만 있던 노가리를 그제야 다시 씹을 수 있었다.
나는 웃으며 녀석을 향해 잔을 들었다. 녀석도 웃으며 잔을 들어 내 잔에 부딪쳤다. 가볍게 유리 부딪는 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그 소리와 함께 아직 완전히 걷히지 못하고 주위에 어렴풋이 머물던 더운 기운도 서서히 녹아 흐트러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