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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석 Dec 16. 2024

레드 콤플렉스 23화(2부 8화)

마지막 기회(2)


배식이 시작되는 시각은 12시 20분. 아무리 바빠도 서두르지 않는 조리장 덕에 배식 5분 전에야 세팅이 완료 되었다. 영양사도 여유만만, 조리장이 별 말이 없으면 배식 5분 전까지 재촉하는 일이 없었다.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조리장을 믿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올해로 학교 급식 조리장만 12년 했다는 그는 적어도 시간 맞추는 데에 있어서는 믿을만한 사람이긴 했다. 


빠듯하게 세팅을 완료하고, 정신없이 배식을 하고 나면 1시가 조금 넘었다. 설거지는 미루더라도 적당히 정리를 하고나면 점심은 1시 반쯤 먹게 된다. 


어차피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밥 먹고 합시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교직원 식당으로 향했다. 나는 그 말이 좋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 먹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어차피 먹고 살자고 하는 일. 그런 마음가짐이면 적어도 밥 굶을 일은 없겠구나, 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데 살다보면 꼭 누군가 그 중요한 ‘먹는 일’을 방해하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아침 7시 40분에 출근하는 사람에게 1시 반 점심은 꽤 늦은 편이다. 한참 배고플 시간이란 얘기다. 성이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하필 1시 반을 넘어 이제 막 먹을 밥을 푸고 있을 때였다. 


“나야.”

“왜? 나 밥 먹어.”


성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알아.”


그게 뭐 대수냐는 듯 녀석이 대답했다. 아무렇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딘지 들뜬 느낌까지 주는 목소리였다.


“알면서 왜 전화해? 무슨 일 있어?”

“리더 형이 오늘 저녁에 가게로 좀 오래.”

“왜?”

“공짜 술 준대.”


패리는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나나 성이에게 공짜로 술을 줘본 적이 없었다. 다른 대가를 치르라고 한 적도 없다. 계산은 계산, 꼭 돈으로 받았다. 처음에는 우리가 미성년자라 그러는 줄 알고 떼도 써봤다. 내가 왜 이 짓 시작했는지 알지? 그러나 그가 뱉은 이 한 마디에 우리는 아무 반발도 할 수가 없었다. 


“진짜야? 뭐 다른 이유 있는 거 아니야?”

“몰라. 그건 가 봐야 알지.”

“나 석식 끝나고 거기로 바로 가도 8시 넘어.”

“알아. 먼저 가 있을게 천천히 와.”


성이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마저 식판에 밥과 반찬을 담아 식탁에 앉았다. 교직원 배식은 11시 20분에 시작이니까 이미 밖에 나온 지 2시간이 지난 음식들이었다. 김이 나지 않는 탕수육 위에서 이제는 걸쭉하다 못해 아예 굳어가기 시작한 소스가 덜렁거렸다. 


삶은 문어를 썰고 있던 패리가 손을 흔들었다. 포장마차에 도착했을 때, 이미 성이 녀석은 혼자 꼼장어에 소주 한 병을 반 넘게 비워내고 있었다. 


“정말 웬일이에요? 꽁치도 아니고 꼼장어까지?”

“살다보면 뭐 그런 날도 있지 않겠냐.”


패리가 씩, 겨우 눈만 움직여 웃어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접시에는 썰린 문어다리가 수북이 쌓였다. 평소 나가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패리는 그 접시를 들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설마 이것도 우리 거예요?”

“그냥 먹어. 오늘은 다 퍼주기로 했으니까.”


패리가 접시 귀퉁이에 초장을 뿌리며 말했다. 나는 살짝 성이를 보면서 눈짓을 해보였다. 그러나 성이도 뭔지 모르겠다는 듯, 한 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나도 한 잔 주라.”


패리가 잔을 내밀자 성이가 패리와 내 잔에 차례로 술을 따랐다. 패리는 술을 받자마자 아무 말 없이 잔을 비웠다. 깔끔한 원샷이었다.


“가게 주인이 술 마셔도 돼?”


성이가 패리의 빈 잔을 다시 채우며 물었다. 그러나 패리는 그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딴소리를 했다. 


“나 군대 간다.”


딴소리는 딴소린데 그게 그냥 가벼운 소리가 아니었다. 정말 가게 주인이 술 마셔도 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나와 성이는 입으로 가져가던 잔을 멈추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이가 들고 있던 잔을 도로 내려놓으며 물었다.


“언제?”

“두 달 남았어.”

“진짜 갈 거야?”

“작년에 한 번 연기 했잖냐. 이제 밴드도 끝났고, 어차피 가야되는 거 그냥 가려고.”


패리가 두잔 째 소주를 비우고 문어 다리 한 조각을 질겅질겅 씹어댔다. 나와 성이는 그제야 받아뒀던 잔을 마저 비우고 패리처럼 굵게 썰린 문어다리를 씹었다. 알싸한 소주 향이 질긴 문어다리와 함께 어금니 쪽에서 짓이겨졌다. 


“그래서 너희들한테 부탁 하나만 하려고 불렀어.”


패리가 말했다. 싸구려라 질기기만 한 문어 조각을 완전히 다 씹지도 못하고 목구멍으로 넘기느라 꿀떡하는 소리가 났다. 문어 조각이 목구멍을 제대로 넘어가지 못한 탓인지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침만 삼켰다. 우리는 뭐냐고 묻지도 못하고 그런 패리를 그냥 보고만 있었다. 


“이 가게를 너희가 좀 맡아주라. 딱 오백에 넘겨줄게.”


군대 가 있는 동안 잠깐 맡기는 것도 아니고, 가게를 넘긴다고?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몰라 성이를 바라봤다. 그러나 녀석도 어쩔 줄 모르겠는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거의 동시에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오백이면 싼 거야. 내가 여기 시작하고 단골만 얼마가 되는지 아냐? 딴 사람 같으면 오백에 절대 못주지. 내가 이거 시작할 때 들어간 돈이 오백이야. 아버지한테 돈은 갚아야하지 않겠냐.”

“그건 알겠는데, 우리가 이걸 맡아서 할 수 있을까? 우린 장사 경험도 없는데.”

“나는 뭐 경험 있어서 했냐? 너희 대충 음식은 할 줄 알잖아. 앞으로 남은 두 달 적당히 배우면 다 해. 마루타, 넌 어떻게 생각해?”


패리가 내게 물었다. 오백만 원. 내가 그 동안 일하며 모은 돈이 딱 250만 원 정도 됐다. 그 돈을 다 털면 적어도 반은 마련할 수 있었다. 성이가 나머지 반을 해결할 능력이 될까 싶기도 했지만 패리하고 얘기하는 걸 봐서는 녀석도 별 문제는 없어보였다. 집이 좀 사는 편이니까 집에다 얘기하면 어떻게 안 될 것도 없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못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아요.”


돈 문제가 아니라면 딱히 걸릴 건 없었다. 급식실 생활을 접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특별히 미련이 남는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내가 반드시 그곳에 있어야할 이유 따위는 없었으니까. 내가 학교에 남은 것은 단지 그곳이 그나마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패리의 포장마차가 학교보다 나을 것 같았다. 이제 그곳은 성이와 나, 단 두 사람이 끌고 가는 세계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좋아. 그럼 일단 너희가 하는 걸로 알겠다. 근데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요?”

“두 개야. 하나는 이 트럭 할부기간이 남았어. 매달 할부금 좀 나대신 갚아라.”


역시 계산은 확실한 사람이었다.  


“뭐야, 그럼 순수하게 오백이 아니잖아.”

“얼마 안 나가. 월세라고 생각해. 그럼 차는 거저먹으려고 그랬냐?”


패리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첫 번째 조건을 마무리 졌다. 그리고 소주 한 잔과 함께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조건, 성이 너, 다시 기타 쳐. 여기서. 어차피 네 가게니까, 노래도 하고. 당장 내일부터 나와서 나한테 일 배우면서 노래 시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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