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기회(1)
성이와 나는 종종 연습실에 놀러갔다. 일주일에 두어 번, 아니, 생각해보면 서너 번이었던 것도 같다. 아무튼 꽤 자주였다. 마루타가 원하면 뭐. 처음 몇 번 정도, 우리가 연습실 키를 빌리러 가면 패리는 그렇게 말하며 키를 내줬다.
패리하고는 몇 번 보지 않아 제법 친해졌다. 서로 말을 걸고, 약속을 잡고, 만나서 같이 놀고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다 언젠가 우리는 아예 패리에게서 연습실 키를 하나 넘겨받았다.
오늘 자다 일어났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하나 복사했다. 무심하고, 지루한 표정으로 그는 말했다. 얼마나 무심하고 지루한 느낌이던지, 일부러 키를 복사하기 위해 열쇠 집을 들른 그의 수고가 감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연습실에서, 우리는 소주병 램프에 불을 붙이고, 음악을 들으며 한 두 시간씩 짧은 잠을 자고, 별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고, 가끔은 초췌한 모습으로 잠든 사내들을 일으켜 세워 연습실을 정리했다.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나쁘지 않았다. 편안했고, 컨디션이 좋을 때는 조금 행복한 것도 같았다.
성이는 잠이 오지 않거나, 한참동안 말이 끊기면 기타를 잡았다. 몇 번 기타를 튕기다가 내가 한 곡 부탁하면 노래를 하기도 했다. 레퍼토리가 다양한 편은 아니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첫 날 받은 감동은 느낄 수 없게 되었지만, 여전히 듣기는 좋았다. 녀석의 목소리는 어쨌든 아름답고, 맑고, 순수했다. 자주 들어도 식상하거나 지루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운이 좋은 날은 포장마차 문을 열기 전 잠시 연습실에 들른 패리가 성이와 같이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성이가 기타를 치면 주로 패리가 드럼을 쳤고, 어떤 때는 성이 대신 그가 기타를 잡고 성이는 노래만 부르기도 했다.
패리의 드럼은 재미있었다. 어딘지 천진한 느낌이 들면서, 아무리 무게를 잡아도 조금씩 경쾌한 느낌이 새어나왔다. 기타는 성이보다 잘 치는 것 같았다. 순간 깜짝 놀랄만한 연주가 성이의 목소리를 제치고 귓속으로 파고들었고, 드럼을 칠 때와는 달리 늘 진지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두 사람의 연주를 듣는 날은 컨디션과 상관없이 행복하거나 즐거운 기분이 들었던 것도 같다.
우리는 그렇게 무딘 시간을 흘려보냈다. 시간은 그야말로 무디게 흘렀다. 침착하게, 조용히, 그리고 느리게. 특별한 고비도, 이벤트도 없이 무심하고, 조금은 퉁명스러운 느낌이었다. 유행처럼 밀레니엄이라는 말이 시중에 떠돌기도 했고, 무게감 없이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이름이 종종 들려오기도 했지만, 그냥 무심히 떠돌고, 들려오는 정도로 끝났다. 아, 시간이 가는구나. 어쩌다 시간의 존재를 떠올릴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그런 나날들이었다.
그 사이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성이는 전문대학교에 들어갔다. 별로 공부할 생각도 없었고, 뭔가 뚜렷한 의지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녀석답게 집에서 그러라고 하니까 군말 않고 그러기로 했다. 나는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했다. 급식업체에 들어가서 한 고등학교의 급식실에서 조리사일을 했다.
예상외로 학교라는 곳에 애정이 많은가보다, 너?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게 패리는 말했다. 나는 그런가 봐요, 라고 대꾸했다. 사실은 뭔가 내 세계가 크게 뒤바뀌는 게 부담스러웠던 것뿐이었지만, 생각해보면 그의 말대로 그것 또한 애정일지도 모르겠다.
취업 문제로 어머니와 조금 다툼이 있었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내가 대학에 가길 원했다. 축구를 할 때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프로로 가지 않고 대학에 가길 바랐던 그녀였다. 축구를 할 때에 비해 - 그것이 아무리 진부하고, 냉정하지 못한 것이었다고 해도 - 어쩌면 미래는 화려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기대하기 어려운 조리의 세계였으므로, 그녀가 그렇게 아쉬움을 느끼는 것도 이해는 갔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설득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투정부리듯 강요하거나 소원 운운하며 애처롭게 부탁하는 게 다였다.
그녀는 지금의 내가 바라는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뭔가 나아가고, 쌓아가기보다 그저 살아남고, 살아가고 싶은 마음. 흔들리지 않고 그저 가만히, 담담히 서있는 나무처럼 살고 싶은 나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랬으므로, 결국 그녀는 나를 이길 수 없었다. 내 선택에 대해 상당히 마음에 안 들어 하고, 서운해 하긴 했지만 오래지 않아 받아들이고, 인정했다.
여름을 앞둔 탓인지 봄볕이 조금 따가운 날이었다. 전체적으로 따뜻한 기운이 세계를 가득 메운 가운데, 이따금 따가운 느낌이 툭, 툭 볼 위에서 터졌다. 어딘지 얼터너티브한 느낌의 날씨였다. 얼터너티브가 뭔지, 음악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정확히 정의할 수 없지만, 성이가 ‘얼터너티브’라며 틀어준 음악을 들을 때 느껴지던 그런 느낌이었다. 보컬의 목소리야 음울하든 어쨌든 내게 얼터너티브란 여지없이 탄탄하고, 통통 튀는 느낌으로 울리는 기타소리로만 기억되고 있었다. 아주 편하고, 따뜻하고, 즐겁기만 한 날씨는 아니었지만, 왠지 상쾌했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아침 7시 30분, 학교를 향하는 길은 그랬다.
“왔냐?”
옷을 갈아입고 주방에 들어서자 조리장이 말했다. 조리원들의 출근 시간은 8시. 나는 보통 7시 40분쯤 출근을 했다. 그러나 조리장은 늘 그 전에 주방에 도착해 있었다. 7시쯤이 그의 출근시간인 것 같았다. 내가 도착하면, 그는 이미 모든 식재료를 필요한 위치에 정돈해놓고 시간이 많이 드는 주찬 조리를 시작하곤 했다.
“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답하고는 곧장 전처리실로 향했다. 손질할 채소가 많은 날이었다. 채소를 씻고, 가벼운 칼질로 다듬고, 필요에 따라 몇 가지는 기계를 써서 채를 썰었다. 그러는 동안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조리원 이모들이 하나, 둘 전처리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벼운 인사가 오가고, 이모들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분주하게 손을 놀리는 소리를 비집고 낮은 톤이지만 어딘지 들떠 보이는 목소리들이 섞여들었다. 그렇게 전처리실이 자리를 잡으면 나는 채소에서 손을 떼고 조리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조리장의 지시에 따라 돼지고기에 튀김옷을 입혔다.
이곳의 생활은 보통 그랬다. 일은 매우 순차적으로 진행되었고, 딱히 어려운 일은 없었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김이 찬 주방의 공기를 견디는 게 조금 힘들어지긴 했지만, 견딜만했다. 사람들하고의 관계도 원만한 편이었다. 이모들은 종종 그녀들 사이의 농담에 나를 끼워 넣었고, 그럴 때면 나는 말없이 웃어 보이거나 네, 고개를 끄덕였다. 조리장은 일에 있어서는 까다로운 편이었지만, 깔끔하게 할 말만 하는 스타일이어서 잔소리가 짜증날 정도는 아니었다.
영양사도 웃음이 많고 친절한 사람이라 크게 부딪칠 일이 없었다. 내가 여태까지 몸담았던 어떤 세계보다 편안한 곳이었다. 주전경쟁이 있었던 축구부나 늘 낯선 곳에 와 있는 것만 같았던 학교와는 달랐다.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별 위험요소 없는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세계에 완전히 적응한 건 아니었다. 이곳이 내 세계구나, 라는 느낌이 없었다. 바다를 헤매다 운 좋게 난민 지위를 확보하며 어느 인심 좋은 나라에 흘러들어간 보트피플 같은 기분이었다. 그냥 한 세계가 나를 받아들여줬다는 느낌 정도. 어쩌다 시간이 생겨 나를 돌아볼 적에, 문득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붕 뜬 기분이 들기도 했고, 갑자기 모든 게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모들의 수다에는 내가 내 힘으로 끼어들 틈이 없었고, 조리장이나 영양사하고는 늘 일에 관한 얘기만 주고받았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그냥 이 세계에 기생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