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콤플렉스 31화(2부 16화)

가까워지는, 그리고 멀어지는(1)

by 이정석


세면대 수전을 청색 방향 끝까지 밀어 열었다. 흘러나오는 미지근한 물줄기에 손을 대고 완전히 차가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손에 얼얼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두 손에 찬물을 모아 얼굴을 씻었다.


한 번 찬물로 얼굴을 거세게 문지른 후 거울을 바라봤다. 피부와 두 눈이 붉어진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깊이 숨을 내쉬자 토할 것 같진 않았지만, 약간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 자리에서만 이미 몇 차례 순간, 순간 기억이 분절됐다.


이렇게 취하도록 마신 게 얼마 만일까.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그런 적이 없었다. 절제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애초에 그렇게 마실 기회도 없었고, 술을 즐기는 편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나는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까.


몇 차례 더 얼굴을 씻고 나니 두 손과 얼굴 전체가 얼얼해지면서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기체에 가까운 무언가가 뇌 사이 사이를 파고드는 듯 몽롱하고 불안정한 느낌은 잦아들고, 냉기에 수축하며 단단해진 뇌가 그 기체에 가까운 무언가와 분리되며 명징해지는 듯했다.


눈을 감으면 다시 혼란해질 것 같아 눈을 부릅뜬 채로 거울을 보며 자세를 가다듬고, 두어 번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요?”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자 지영이 웃으며 물었다. 옆에 있던 동주도 재미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이 만약 걱정스럽게 물었다면, 이를 핑계로 집에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나를 반기고 있었고, 쉽게 집에 보내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이곳은 지영의 집,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영과 동주의 집이었다. 동주는 지영의 무리에 함께하고 있는 다른 한 명의 여학생이었다.


“네, 괜찮아요.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나는 천천히 손을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나와 두 사람은 거의 정확한 정삼각형 대형으로 가운데 과자와 오징어 따위 마른안주를 두고 떨어져 앉아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동주는 기다렸다는 듯 내 몫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관계가 확장됐다. 지영과 가까워진 것을 계기로 그녀의 친구들과도 조금 친숙해졌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성이 대신, 혹은 잠깐 틈이 나면 그들의 술자리에 합석하기도 했다.


나는 주로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고, 가끔 그들은 내 의견이나 경험을 묻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짧은 답변으로 잠깐 말을 섞었다. 그들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꽤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만큼 그들의 이야기에 내가 깊게 참견하거나 이어갈 만한 거리들이 많진 않았다.


가끔은 내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화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그런 때면 지영과 처음 술을 마신 날과 마찬가지로 나는 조금씩 내 이야기를 풀어냈고, 역시 성이와 지영은 마치 처음인 듯 다른 이들과 함께 고개를 주억이며 잠자코 듣곤 했다. 성이는 그동안 그들과 어울리면서도 나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이야기를 듣는 그들의 반응도 그랬고, 어쩌다 내 말을 거들 때 성의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나름대로 내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려고 노력한 모양이었다.


지영과 동주 외 세 남자의 이름은 지원, 경수, 동우라고 했다. 성이는 그들과 반말을 주고받았지만, 나는 여전히 성이를 제외한 모두와 존대하고 있었다. 말의 방식은 달랐지만, 크게 불편하거나 어색하지는 않았다.


지원, 경수는 지영과 같은 신문방송학과를 지망하고 있었고, 동우는 정치외교학과 지망이라고 했다. 동주는 아직 희망 전공을 정하지 않았다. 그냥 점수 맞춰서 학교와 단과대를 선택했다고 한다. 친구들은 대학 와서도 다시 경쟁해서 원하는 과를 가야하고 자칫 잘못하면 원하는 과를 가지 못할 수도 있지만, 저한테는 과가 정해지지 않은 게 더 다행이기도 해요. 꼭 하고 싶은 게 있었던 건 아니어서 학교와 단과대를 고르는 것만 해도 꽤 피곤한 일이었거든요. 그녀는 말했다.


이들은 새터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다. 새터요? 나로서는 처음 듣는 단어였다. ‘새내기 새로 배움터’라고 줄여서 새터로 불러요. 다른 말로는 오티라고도 하는데, 뭐 가서 하는 건 엠티랑 비슷하긴 하지만, 학교 입학하기 전에 한다는 게 다르고 선배들하고 친구들을 단체로 처음 만나는 자리로 보면 돼요.


아직 과가 정해지기 전인 신입생들은 번호순으로 일종의 학급 같은 단체로 분류됐고, 새터에서는 그 안에서도 몇 명씩 조를 짜 같이 생활했다. 그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한 조에 속한 친구들이었다.


한 단과대에서도 한 학급, 그리고 그중에서도 한 조로 만났으니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원래는 10명이 한 조였는데 지금까지 몰려다니는 친구들은 우리 다섯이 다예요.


누군가는 재수를 택했고, 누군가는 자신이 원하는 과 쪽으로 자신의 활동 영역을 정했고, 누군가는 조용히 그들과 멀어졌다. 마침 집에 가는 방향이 비슷했던 이들 다섯 명은 선배, 동기를 만나는 대부분의 술자리를 같이하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귀갓길도 함께하며 하나의 그룹이 되었다.


그날은 그들 중에서도 지영과 동주, 두 명의 여자 멤버만 가게를 찾았다. 지영이 처음 혼자 방문했을 때처럼 꽤 늦은 시간, 평소와는 다른 편한 차림이었다. 하필 성이가 집에 일이 있어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마감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어? 오늘은 좀 빨리 닫네요? 안 되는데.”

지영이 말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미안하지만 오늘은 나도 중요한 일이 있어서 빨리 들어가 봐야 해.”

“오늘 너랑 동규 씨도 같이 먹자고 하려고 동주랑 일부러 이 시간에 왔단 말이야.”


성이의 대답에 지영이 투정조로 말했다.


“그럼 오늘은 나 빼고 쟤랑 놀아. 동규 너는 시간 괜찮지?”


성이는 당연하다는 듯 내게 물었다. 일이 끝난 후 시간이 비는 건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일이 끝나면 성이와 가볍게 한 잔 하거나, 그 외에는 그냥 집에 들어가는 것. 그게 내 보통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성이도 없이 이들과 갑자기 술자리를 갖는다는 건 당연하다고 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어, 시간은 괜찮긴 한데……”


내가 모호한 반응을 보이자 성이가 내 옆을 천천히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내 친구들이긴 하지만, 단골 관리라고 생각하고 좀 놀아줘. 이제 너도 친하잖아. 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흔쾌히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어려울 것도, 곤란해할 것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체념이나 감당한다는 의미보다는 그저 일상적으로 지나는 상황으로 그들과의 술자리를 받아들였다. 그들과 나의 관계는 이미 얼마 전부터 시작됐고, 그 관계는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언제든 이런 만남이 있어도 이상한 것까진 없을 만한 정도는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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