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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꽃 May 21. 2024

낭만버스


'버스'하면 생각나는 것은 멀미에 대한 기억이 전부였다. 초등학교 소풍 전날 엄마는 잊지 않고 '귀미테'를 샀고 나는 마치 주문이라도 걸듯 그것을 귀 밑에 꼼꼼히 붙이곤 했다. 그러나 어김없이 차는 흔들렸고 나는 멀미를 했다. 선생님이 정해준 좌석에 꼼짝 않고 앉아서 껌과 오징어를 씹어도 떨칠 수 없던 멀미의 기억, 때문에 목적지에 도착할 때마다 나는 한 번씩 먹은 것을 대차게 쏟아내야 했다. 그래서일까? 버스 하면 떠오르는 건 멀미의 비릿한 냄새들이 전부였다.


중학생이 되고 나는 비로소 처음으로 혼자 버스를 탔다. 학교에서 우리 집까지는 고작 15분 거리, 그간 버스 탈 기회가 없던 나는 두 정거장 거리에 사는 친구가 생기면서 종종 버스를 타게 된 것이다. 다행히 그때는 이미 멀미 따위는 하지 않게 되었을 때이다. 나는 드디어 버스 타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심지어 멀리서 통학하는 친구가 부럽기까지 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한 시간 거리 정도 되는 혜화동으로 학교를 다녔는데 늘 함께였던 단짝 친구 덕분에 등하굣길은 언제나 즐거웠다. 비록 아침에는 지각할까 봐 지하철을 이용했지만 하교 시간에는 언제나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왜 갑자기 버스 타는 것이 좋아졌을까? 버스가 좋았던 것일까 친구가 좋았던 것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그즈음 함께 다니는 친구가 늘어나면서 '우리'는 점점 버스 맨 뒷좌석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점령'이라는 단어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골랐다.


매번 버스가 도착하면 우리 중 누군가는 제일 먼저 뛰어가 버스 맨 뒷좌석에 비집고 들어앉곤 했다. 뒷좌석이 꽉 찬 날이면 우리는 험상굳은 표정으로 그 앞에 죽치고 서서 누가 내릴 것인가 한참을 노려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하다. 그 누가 그 시절 소녀들을 말릴 수 있으리! 그런데 흥미로운 건 우리는 제법 '곧 내릴 사람들을' 알아맞히곤 했다는 점이다. 깊은 잠에 곯아떨어져도 허겁지겁 내리는 부류가 있고 내릴 듯 말 듯 두리번거리지만 한 시간 내내 궁둥이만 들썩이는 사람도 있었다. 운이 좋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앉아서 긴긴 수다를 즐길 수도 있었다.


나는 지금도 눈을 감아 그때를 떠올리면 버스 안 풍경을 그대로 옮겨올 수 있다.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들이 삼삼오오 떼 지어 버스에 오르면 제각기 얼굴에 꽃을 피운 여학생들은 재잘재잘, 남학생들은 힐끔힐끔. 버스 맨 뒷좌석에 앉으면 이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 얼마나 좋은 자리인가! 물론 지금의 나는 버스 탈 일도 많지 않거니와 가끔 버스를 타도 내릴 때를 위해 최대한 앞 좌석에 앉는다. 맨 뒷좌석에서 앉으면 내려올 때 무릎에 충격이 가기 때문인데 좀 서글픈 생각도 든다. 때때로 사람이 많아 손잡이를 잡고 서 있게 되는 날이면 나의 눈은 어느새 버스 맨 뒷좌석으로 시선을 옮긴다. 창틈 사이로 찰나의 바람이 불어오면 마법처럼 들리는 여고생들의 웃음소리, 나는 어느새 낭만 버스에 타고 있다.  


버스에 대한 다른 추억도 많다. 한 번은 시험기간 만원 버스 안에 서서 힘겹게 영단어를 외우던 중 갑자기 버스가 급정거를 하는 게 아닌가. 온몸을 실어 맞은편 좌석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는데 글쎄 그 좌석에 앉아있던 빼빼 마른 남학생의 전신이 들썩였다. 깜짝 놀라 날 쳐다보던 남학생을 보며 나는 당시 민망함보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괴로웠던 기억이 있다. 그도 당황했을 텐데 남학생에게 문득 미안하다.


또 한 번은 치마교복을 입고 다소곳이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있을 때였다. 신나게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쿵- 하고 들썩이더니 급정거한다. 역시 신나게 수다를 떨던 나는 버스 맨 뒷좌석에서 벌떡 일어나 자그마치 맨- 앞 좌석까지 전력을 다해 뛰었다. 넘어지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친구 옆자리로 다시 돌아올 용기가 없었던 나는 요금통 옆에서 쭈그러질 참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몹시 걸리적거린다는 듯 기사님이 곁눈질을 한다. 결국 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버스 맨 뒷좌석으로 돌아와 친구와 한참 동안 깔깔댔던 기억이 있어. 웃다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돌아보면 나에게 처음 낭만을 가르쳐 준 건 버스였을지도 모른다. 지독했던 멀미의 기억은 어느새 낭만의 기억으로 덮였고 나는 버스를 무척 사랑하게 되었다. '버스 종점까지 가보기'는 아마 누구나 한 번쯤 해 보았으리라. 하루는 단짝 친구와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이어폰을 나눠 끼고 버스 종점까지 간 적이 있다. 혜화동에서 의정부 까지였던 것 같다.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각자 음악을 듣고, 시원하게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이 날려 간지럽던 기억. 우리가 나눠 발랐던 핸드크림의 향긋한 냄새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나는 종종 낭만버스를 타는 상상을 한다. 눈을 감고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아련한 기억들. 낭만은 소리와 향기를 타고 내 마음 깊은 곳까지 다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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