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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꽃 May 23. 2024

나도 시인이 될 수 있을까?

시쓰기에 필요한 명언들


나도 시인이 될 수 있을까?


시인의 자격


이 글에서는 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루지 않을 생각이다. 시의 본질을 구하고 시작법에 대해 논하기에 나는 아직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편 나는 시인의 자격을 논한다는 건 의미 없는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단락에서 '시인의 자격'이라는 소제목을 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와 당신은 시인이 될 자격이 있는가? 생각해 보자는 일종의 반문일 뿐이다. 


창작과 모방 사이


그 글이 쓴 것처럼 느껴진다면 다시 써라.
– 소설가 엘모어 레너드-


수년간 단련된 애드센스 글쓰기로 인해 내세울 거라곤 키워드 검색 능력이 전부인 나는 -미안, 수식이 길다- 시를 쓸 때도 구글링을 즐겨한다. 내가 떠올린 표현을 혹 누군가 사용하지 않았을까 노파심이 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분명 내가 떠올린 단어의 조합인데 이미 사용한 사람들이 있다. 믿거나 말거나 유명한 시인도 나와 같은 시의 언어를 구사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우쭐대지는 않는다. 예술가가 찍은 점 하나와 내가 찍은 점 하나는 분명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그 어떤 마음이 진심이 아니겠는가? 다만 내가 쓰는 시는 습작훈련이 덜 된 '불완전한' 시임은 부정할 수 없다. 마치 운동선수가 준비운동이 덜 된 것과도 같다고 해야 할까? 나는 시란 부분이 아닌 전체라고 생각한다. 우연히 떠오르는 단 하나의 아름다운 단어만으로는 시를 완성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만약 구글링을 하다가 누군가 같은 표현을 사용했더라도 무조건 물러설 필요는 없다. 만약 도저히 그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면 그건 아마도 내 안에서 식상함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내 마음은 이미 알고 있다. 내 것인지 네 것인지. 


책을 멀리하라.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사람들도 멀리하라.
그래야 언제나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글을 쓸 수 있다.
-조지 버나드 쇼-


책을 멀리하라는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은 꽤 충격적이었다. 비록 다독보다는 엄선된 책들을 반복적으로 읽는 편이지만 책을 멀리하라는 말은 나의 '독서론'의 근간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아일랜드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버나드 쇼에 대해 조금만 더 알아보자. 아주 조금만. 


1856년 7월생인 그는 중산층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 정규교육을 싫어한 걸 보면 나처럼 반항적 DNA를 가졌음이 분명하다. 풍자와 기지로 신랄한 작품을 쓰기로 유명한 그는 독설가이자 사회주의자였는데 한 때 런던에 머물며 도서관에서 수많은 책을 접했다고 밝혔다.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글을 쓰기 위해 책을 멀리하라'던 버나드 쇼의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다독의 역설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었다. 놓칠 수 없는 포인트지만 다독이 틀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을 조심하라.
-토마스 아퀴나스-


지난 글에서 언급했지만 나는 책편식이 심한 편이다. 장르의 편식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까탈스럽게 책을 고른다. 어른이 되고 깨달은 점 중 하나는 책으로 태어난 글들이 모두 나에게 가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심지어 해로운 책도 있다고 생각했다. 해롭다는 뜻은 나를 해친다기보다는 '작가의 편견이 가득한 책' 또는 '정보도 메시지도 주지 못하는 책'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물론 작가들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개인의 기호에 가깝다. 어떤 책이든 그만의 메시지와 울림으로 독자를 갖기 때문이다. 때때로 글보다 서사가 주는 감동과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으니 비록 내가 취하지 않더라도 따뜻한 메시지를 담은 책들이 널리 읽히는 것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모방 이야기가 나왔으니 빠질 수 없는 말이겠다. 모방은 분명 창조의 어머니다. 다만 나쁜 모방은 존재하니 문제다. 좀 엉뚱한 예를 들어볼까 한다. 중국 유학 시절 때의 일이다. 유학생 모임에서 다양한 외국인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들의 중국어를 유심히 들어본 결과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중국인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는 경우와 외국인끼리 룸셰어를 할 경우 똑같이 중국어를 사용하지만 그 차이가 극명했다. 중국인 집에 사는 친구는 네이티브 발음을 모방한 것에 비해 외국인 친구들은 '서로 틀린 발음의 중국어'를 장시간 학습하고 있었다. 심지어 성조와 말습관마저 닮아갔다. 분명 '나쁜 모방'이었다. 내가 책을 편식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나쁜 모방의 다른 예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일단 다루지 않기로 한다. 


시의 언어들

달이 빛난다고 말하지 말고
깨진 유리조각에 반짝이는
한 줄기 빛을 보여줘라.
–안톤 체호프-

 

시를 펼쳐놓은 것이 산문이고 산문을 응축시킨 것이 시가 아닐까? 시의 언어들은 사뭇 달라 보인다. 마땅히 불려져야 할 노래처럼 운율과 울림이 있다. 자유시, 정형시, 산문시가 있다지만 현대시에서 격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희곡을 대화 형식으로 쓴 극시는 또 어떤가? 심지어 서사시는 시의 언어로 쓰인 소설과도 같다. 한국인이 유독 사랑하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글을 쓰는 법을 음악에서 배웠다고 하잖는가? 시는 눈과 귀, 그리고 마음으로 감상하는 것이 맞다. 오늘 내가 시의 언어들에 대해서 더 오래 찬미하지 못하는 건 아마도 나의 부족함이거나 시의 넘치는 매력 때문일 테다. 


시인의 마음

나만의 목소리를 갖기 위해선
그 목소리가 전달될지 여부는
잊어버려야 한다.
-앨런 긴즈버그-


예술가는 일정 부분 나르시시즘을 품고 살아간다. 차마 나도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나를 예술가의 반열에 올리지 못하는 이유일 뿐이겠다. 심리학에서 '승화'란 일종의 '치유'이며 내적 욕구를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다른 형태로 표출하는 것을 말한다. 유머 또는 예술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혜로운 사람에게서는 위트를 매력적인 사람에게서는 예술적 감각을 엿보곤 한다. 물론 둘 다 갖춘 넘사벽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나르시시즘과 예술의 상관관계는? 나르시시즘은 일종의 자의식 과잉 상태를 말한다. 자의식 과잉 상태의 사람들은 자기표현 욕구가 강하다. 평판에도 민감하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만 실제로 예술가 중에서는 나르시시스트가 많다고 한다. 평판에 민감한데 자의식이 강하다는 건 뭘 의미할까? 내가 처한 상황과 행동, 성격 등에 대해 빠르게 반응하지만 타인의 평판에 민감하여 나로 사는 것이 무척 힘겨워지는 상태, 심하면 정신질환에 이르지만 적당한 자기애로 그친다면 예술적 승화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이쯤에서 적절한 나르시시즘을 위해 우리가 되새겨야 할 말은 아래 앙드레 드뷔의 한 마디가 아닐까 한다. 


재능은 싸구려다.
중요한 건 훈련이다.
-앙드레 드뷔 


시는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재능은 싸구려고, 시의 기능이 무엇이든 이를 다하려면 습작훈련이 필요하다. 나는 원래부터 경험주의자고 운명보다는 노력을 믿는 사람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노력'을 믿고자 하는 사람이다. 운을 믿지 않지만 기적을 믿는다는 것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웬 괴변인가 할 텐데, 나는 인생에서 '절대 선(善)'이라는 종착점을 찍어놓고 달리지만 그곳까지 다다르는 건 일종의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더 쉽게 말하면 나는 100점을 목표삼지만 100점이 아니어도 괜찮은 마음을 지향한다. 어떤 성과를 낼 때 재능은 종종 걸림돌로 작용할 때가 있는데 이는 재능 자체의 문제인 경우보다 재능 주인의 마음상태의 문제일 때가 많다. 그런 이유로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언제나 더 중요한 건 노력이고 선이라고 생각한다. 단, 재능에 욕심 없다는 거짓말은 굳이 하지 않겠다. 


시를 쓰는 이유


마지막으로 이 글의 하이라이트인 시를 쓰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중이다. 오늘 오전 어떤 작가님이 던진 질문이 나에게 이처럼 긴 파장을 몰고 왔다. 나는 왜 시를 쓰는 것일까? 분명 나에게도 예술적 승화를 위한 미적 욕구가 있다. 흔히들 말하는 시적 충동에 안 쓰면 안 될 것 같은 경험도 했다. 인간의 언어가 어디까지 아름다울 수 있는가에 대한 호기심 또는 언어수집 욕망도 있다. 이것이 시를 쓰는 나의 첫 번째 이유이다. 


글쓰기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형태의 정신분열증이다.
-E.L. 독토로우-


시를 쓰는 두 번째 이유는 시의 치유의 기능을 믿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형태의 정신분열증이라는 말은 끔찍하지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방송작가에서 배우, 코미디언, 소설가, 극작가 등 유머와 예술의 승화를 실현해 낸 스티브 마틴 역시 '의식은 편집자고 무의식은 작가다'라는 소름 돋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시는 나의 잠든 무의식을 끄집어내 흐르게 한다. 현실에서 뱉어낼 수 없거나 들어주는 이 없는 나의 가여운 언어들은 시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태생이 수다쟁이다. 그런데 말이 많으면 화가 많은 법이다. 그래서 점점 동굴속로 들어가려던 나를 끄집어낸 준 것 역시 시다. 오직 시를 통해서만이 검열 없이 나의 모든 감정을 쏟아부을 수 있다. 그것이 시가 가진 치유의 힘이 아닐까? 이쯤에서 다시 한번 정신이 번뜩 들만한 W.R. 잉크의 한 마디를 전하고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참고로 오늘 작가의 명언들이 쏟아져 나오는 건 일부러 찾아본 것이니 너무 놀라지 말기를. 나는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다. 혹 내 글이 별 도움이 안 되어도 뭐든 얻어가시라고 명언들을 나열해 봤다. 

 

문학은 그것이 반은 장사
반은 예술일 때 가장 번창한다.
-W.R. 잉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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