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중턱에서
어릴 적 흙탕물을 유리병에 담아 방구석에 놔두면 어느새 진흙이 가라앉고 맑고 투명한 물이 병을 가득 채웠던 기억이 있다. 장난기가 발동해 한 번 더 흔들면 더럽고 혼잡한 입자들이 뿌옇게 일어나고 병 속은 이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마흔의 시작은 나에게 흙탕물과 같았다.
마흔의 문턱에서 나 역시 불혹을 기대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웬걸 마흔은 불혹(不惑)이 아닌 미혹(迷惑)을 예고했고 삶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강한 어퍼컷을 날렸다. 불행은 나를 피해 간다고 생각한 것이 오만이었을까. 맷집이 생기면 웬만해서는 아프지도 않다. 혼란스럽던 마흔의 중턱을 지나 혼탁하기만 하던 내 시간의 입자들도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고 있었다. 나의 혼란은 어떻게 평온을 되찾게 되었을까?
아이를 키우던 지난 십여 년 동안 나는 아이의 시간을 따라 태어나 걷고 배우며 유년과 청소년 시기를 다시 한번 살았다. 시간을 역행하는 동안 나는 나의 엄마를 떠올리거나 종종 아빠를 원망했고 오빠와 언니와의 기억 속 사건들이 일치하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융은 마흔이 되면 마음에 지진이 일어난다고 했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제2차 성인기를 마흔부터로 보았고 이 시기 우리는 태어난 이래 두 번째로 정체성을 획득한다고 한다. 예상한대로 1차 성인기는 십 대부터 마흔, 첫 번째 정체성은 사춘기에 형성된다. 즉, 마흔은 우리가 사춘기 때 미처 해결하지 못한 '미해결 문제'를 해결하는 시기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 같다. 청년기를 거치며 자녀, 배우자, 부모로서 갖추었던 사회적 얼굴인 페르소나(가면)를 걷어내고 자신의 그림자(어두운 나/ 억압된 나)와 마주해야 하는 경건한 시간이 바로 마흔, 중년의 시간인 것이다. 뿌옇게 일던 흙탕물이 가라앉는 시간, 나는 비로소 어릴 적 흙탕물이 담긴 유리병이 왜 자꾸 떠올랐는지 알 것 같다.
마흔에 직면해야 할 과제는 생각보다 많았다. 아이는 사춘기가 되었고 부모님은 쇠약해졌으며 부부관계도 예전 같지 않았다.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고 반복되는 인간관계의 공허함에 무기력해졌다. 때때로 내가 해결할 수 없고 어쩌면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문제에 봉착하면 절망감을 느꼈다. 이쯤에서 가면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나를 찾아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었지만 현실의 나는 엄마였다. 그럼에도 '에미'에게는 '새끼'가 있으니 살아진다는 표현은 진리다. 죽는 것도 자유롭지 못한 '에미'는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아야 하니 안 하던 운동도 한다. 자식에게 부담 주지 않기 위해 경제적인 안정도 추구해야 하니 제2의 삶은 덤이다.
중년의 부모에게 사춘기 자녀가 있는 것은 필시 우연이 아닐 것이다. 독립된 인격체를 갖추기 위해 부모를 떼어내려고 바득 대는 아이 덕분에 나는 더듬거리며 반강제적으로 내 자리를 되찾게 되었다. 다시금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가지지 못한 것을 욕망하며 헤매는 삶은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 같다는 오늘 아침 읽은 성경구절도 떠오른다.
이제 곧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인데, 이쯤에서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태도를 정리해 봐야겠다. 십여 년 동안 열심히도 달려봤고 정체하던 날들을 지나 무기력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적도 있다. 그 사이 나는 각종 자기계발 책들을 섭렵했으나 그것들을 모두 내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날에는 심리학 서적을 들여다봤다. 육아서적을 시작으로 아동심리, 감정코칭, 사춘기 뇌, 부모교육과 가족상담, 심지어 정신분석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상반되는 심리학 이론을 붙들고 이것저것 다 대입해 봤으나 아는 게 많아질수록 오히려 혼란이 가중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흐르는 물은 결코 썩는 법이 없다. 멈추지 않으면 언제든 모든 점들이 연결되는 순간이 온다. 점은 선이 되고 선은 면이 되어 점차 나의 퍼즐이 맞춰졌다. 여전히 서툴지만 어쩌면 마흔의 끝에서 나는 불혹을 경험할지도 모르겠다. 마음먹기에 달렸고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마음먹기가 쉽다는 말도 부정적인 감정을 회피하라는 말도 아니다. 기쁘기도 슬프기도, 밉기도 좋기도 한 양가감정은 분노 또는 죄의식과 함께 위태롭지만 알아채는 순간 극으로 달리기를 멈추고 영원하지 않다는 말은 영원하다는 말과 상반되는 의미가 아니었다.책 속의 나열된 지식은 마치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를 보완할 뿐이었고 지식이 지혜가 되는 순간은 바로 내가 그것을 내 인생에 알맞게 적용하게 될 때뿐이다. 모든 것은 유기적이고 가변적이다.
물론 내가 만약 십여 년 전으로 돌아가 이 글을 읽을 수 있다 해도 '이미 알고 있다는 착각'을 버리지 못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 십여 년을 보내게 될 테지.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도. 마치 내가 나의 10년 후 모습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단, 알 수 없다는 것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뜻이니 불안해할 이유도 없음을 이제 나는 안다. 흙탕물이 가라앉으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불안을 이기고 뿌옇게 탁해진 흙탕물이 맑은 물로 변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차분히 지켜보는 중이다.
지난 보름의 휴가 중 나는 다시없을 줄 알았던 불행의 쨉 한 방을 맞고 잠시 휘청거렸다. 덕분에 흙탕물을 떠올린 것이 아닐까. 어쩌면 앞으로도 반복될 일임을. 나는 아직 삶이라는 링 위에 있음을. 한 번보다는 두 번, 두 번보다는 세 번의 연습이 있었으니 덜 아프고 더 잘 이겨낼 나 자신을 응원해본다. 나는 존재하고 기꺼이 견디고 충분히 누리며 살아갈 작정이다. 주름잡지 말자. 어느 인생에 풍파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