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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사

가장 설립자다운 치사였다.

by 이미숙

나이는 제법 많았지만 10년을 경력 단절녀로 살다가 재취업을 하는 바람에 국어과의 가장 막내였기에 학교 행사 각종 행사문을 대필하는 일을 4, 5년을 했다. 생각하기 나름인데 처음에는 좀 짜증스러웠으나 나중에는 내가 교장이려니, 이사장이려니, 설립자려니 생각하고 공들여서 학생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쓰고는 했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써준 원고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읽는가 하면 어떤 이는 공들여 쓴 원고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경우든 식상했고, 식상하니 감동이랄 것도 없었고, 감동이랄 것이 없으니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순서에 불과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엊그제께 입학식에서 설립자겸 이사장은

"어쩌면 내 자랑이 될 수도 있지만 부끄러운 나의 이야기를 오늘은 해 보려고 합니다."라고 포문을 열었다.

작은 반농반어촌에서 태어나 농부나 어부였을 부모처럼 살지 않기 위해 살아온 신산한 과정을 한 편의 시처럼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다. 10여분이었는데 길다면 긴 시간이었으나 그 어느 해 입학식보다 학생들이 덜 소란했다. 그만큼 팔순이 넘은 이사장의 고입 실패담과 가난한 농부나 어부로 그 부모의 뒤를 밟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 삶의 과정을 온몸에 힘을 빼고 자분자분 이야기하는 모습이 참 곱고 아름다웠다.

나만 그렇게 보고 들은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참석했던 선생님들이 '참 좋더라.'는 말을 했다. 이사장이 뭔가 많이 변한 것 같다고들 했다. 입학식 끝나고 일일이 선생님들과 악수를 나누며 내게

"늙은이가 말이 너무 많았지요?"라고 물었다.

"난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목소리로

"아닙니다. 멋졌습니다. 정말 좋았습니다."

물기가 모두 눈가로 모여들었던지 눈가가 게짐게짐하니 붉었다. 손을 잡으니 내 손아귀에 그의 조그맣고 물기 없는 손이 옴팡지게 들어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눈에서 늙음의 겸손을 잠시 읽은 것도 같다.

조금 더 내 눈빛을 친절하게 하고 허리를 조금만 더 굽혀 감사를 드렸어야 했다는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나는 분명 그 치사에 감동했음이 분명했다.


그의 치사에는 멋부리려고, 똑똑해 보이려고, 힘이 있다는 것을 내보이려고 취사선택한 단어가 없었고, 멋져보이려고, 현학적으로 보이려고, 시집을 몇 권 낸 시조 시인처럼 보이기 위해 내건 멋드러진 단어도 없었다.

노인 특유의 어눌한 말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애쓰는 모습이, 혹시나 너무 자신의 말이 길어지지나 않을지 조금 급하게 싶은 말들을 급하게 줄이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낮게 깔리는 말만큼이나 귀가 아래로 늘어졌다. 귀빈 몇 사람과 강당을 걸어 나가는 그는 말처럼 걸음걸이도 조심하는 것 같았다. 연단 위의 설립자이자 이사장으로 섰을 때는 참 고와 보였는데 어깨를 동그마니 모으고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조금은 쓸쓸해 보였다. 그는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장 자기다운 치사를 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강당을 나가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냥 처음으로 살면서 누군가의 치사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 것 같다.


그는 그다운 치사를 이제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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