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배신을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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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준비를 했다.
그의 핸드폰에서 연락하는 여자가 있는 걸 알고나서부터.
아이폰 숨김 폴더에 그 여자와 찍은 다정한 사진들, 그 여자의 집에 드나들었던 흔적들, 회사 사람들이랑 간다던 발리와 제주도 여행이 그 여자랑 간거였다는 걸 확인하고부터.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 밤새 머릿속으로 수백 번을 시뮬레이션했다.
그런데 막상 그를 보니 내 입은 바보 같은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
“너 여자 있는거 다 알고 있는데… 이해해줄게.
그동안 나도 애 낳고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아.
정리하고… 앞으로 가정에 충실하겠다고 하면 나도 모른척할게.
너 원하는 거 하고 듣기 싫은 소리 안 하고… 나도 노력해볼게.”
내가 했던 말은 변명에 가까운 고백이었다.
그 말에 나는 없었다.
그냥 애 아빠를 잃을 수 없고 나는 경제력이 없어 너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인정이고 항복이었다.
나는 그에게 자처해서 핑곗거리를 던져주고 만것이다.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너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
당분간 생각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나가서 따로 살아볼게.”
그는 그렇게 말했다.
본인의 옷가지와 컴퓨터를 챙기며 거의 이삿짐을 싸다시피 하고 집을 나갔다.
그를 붙잡지도 막지도 못한 채 나는 울고 있었고 그는 그런 나를 뒤로하고 말했다.
“너가 조금만 버티고 참아주면 우린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을 거야. 내가 다시 돌아올 수 있으려면 너가 조용히 있어야 해. 부모님한테도 친구들한테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조용히 이대로 잠깐 떨어져서 살아보자.”
그 순간에도 나는 믿고 싶었다.
그가 돌아올 거라고 이건 잠깐의 혼란일 뿐이라고.
내가 더 착해지면 내가 더 참으면 그가 다시 가정으로 돌아올 거라고.
하지만 그가 문을 닫고 나가던 그 뒷모습은 너무도 담담했고 너무도 가벼웠다.
나는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아, 이 사람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가 아닌채로 살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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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집을 나간 후,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특히 부모님에게는.
걱정이 많으신 분들이다.
딸이 이런 일을 겪고 있다는 걸 알면 마음고생이 너무 클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는 척했다.
눈이 퉁퉁 부어 있을 땐 잠을 설쳤다고 둘러댔고,
혼자 밥을 먹는 게 너무 익숙해졌을 때쯤엔 그 사람이 일이 늦어진다고 출장 중이라고 그냥 바쁜 거라고 거짓말을 보탰다. 그는 한 술 더 떠 거짓말을 했다.
내가 부모님께 얘기했는지 살피기 위해 안부 전화를 드리는가 하면 부모님이 집에 오시겠다는 연락이 오면 그는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거나 아이와 장난을 치거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채웠다.
부모님이 집으로 돌아가면 그는 다시 옷을 챙겨 나갔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었다.
나는 매일 거짓말을 했고,
그는 매일 연기를 했다.
우리는 더 이상 부부가 아니었지만,
아무도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아니, 나만 모른 척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느 날, 소문처럼 찾아온 말 한마디가 나를 무너뜨렸다.
"그 사람… 여자랑 같이 산대."
처음엔 들은 척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헛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아이가 있는데 부모님도 아는데…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사실이었다.
그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집을 나가 놓고 다른 집에서 다른 여자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처음엔 그 여자의 원룸에서 같이 살다가 나중에는 버틸 수 없어 결국 집을 구해 이사를 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혹은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의심은 증거로,
슬픔은 분노로,
기다림은 허무함으로 바뀌었다.
그제야 나는 알게 되었다.
그가 돌아 온다고 한들 이제 다시는 '우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더 이상 내가 붙잡아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붙잡히는 사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