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과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기 시작했을 때 나도 모르게 꾹꾹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올라왔다.
분노, 배신감, 서운함, 슬픔...
그 감정들이 처음엔 나를 쓰러뜨릴 것 같더니 글을 쓸수록 조금씩 조금씩 가라앉았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제는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거의 사라졌다는 걸.
미움도, 애증도, 기대도 없었다.
그저 아이의 아빠로서 공동의 부모로만 남으면 충분했다.
그가 지금 누구와 살고 있든 그 시절의 상간녀와 아직 함께이든 아니든 이제는 더 알고 싶지 않았다.
알아야 할 이유도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 회사 서랍 깊숙이에는 아직도 그때 진행했던 상간녀 소송의 판결문이 남아 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종이를 꺼내볼 일이 없다.
그건 이제 나의 현재가 아닌 과거의 기록일 뿐이었다.
나는 그저 지금 현재의 내 삶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침엔 아이를 깨우고 아침밥을 챙기고 주중엔 일하고 퇴근 후엔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주말이면, 나의 소중한 사람과 아이와 함께 조용하고 따뜻한 일상을 보냈다.
그건 예전엔 상상할 수 없던 평화로운 삶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면접 교섭을 다녀온 아이가 무심코 했던 말 하나가
그 사람의 평정을 건드린 것 같았다.
“집에 삼촌 있어.”
아이는 악의 없이 말했을 것이다.
평소처럼 주말에 함께 시간을 보내던 사람,
자기를 예뻐해주고 같이 게임을 해주는 사람.
아이는 그저 그런 일상의 일부를 이야기했을 뿐인데 그 이야기를 들은 그는 예전의 그 사람으로 돌아갔다.
카톡, 문자, 전화.
장문의 메시지와 전화가 폭풍처럼 쏟아졌다.
“너는 엄마 자격이 없다.”
“애 생각은 안 하고 니 행복만 챙기냐?”
“애랑 단둘이 사는 집에 남자를 들이는 게 말이 되냐?”
“다른 이혼한 엄마들은 엄청 고민하고 아이가 상처받을지가 최우선이라 조심스럽던데 너는 전혀 아니고 니가 중요한 것 같다 그런거라면 너는 너대로 살아라 내가 애 데려가겠다. ”
그는 다시, 예전처럼 내 삶에 이래라저래라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메시지들을 읽고 한참을 핸드폰을 내려다본 채 가만히 있었다.
그가 쏟아낸 말은 익숙한 문장이었다.
이혼하기 전에도 그와 갈등이 심해질 때마다 그는 늘 ‘엄마 자격’이라는 말을 꺼냈다.
엄마라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식의 말.
엄마는 견뎌야 하고, 참아야 하고, 자기 욕심 따윈 내려놔야 한다고.
그 말 때문에 나는 그의 불륜과 바람을 몇 번이나 참고 눈 감아주었고,
돈 많이 벌어다 주는 남편 앞에 경제력 없는 못난 엄마 였던 나는 그 말 앞에서 스스로를 죄인처럼 몰아세웠었다.
나만 참으면 아이는 행복하다. 나만 참고 있으면 아이는 괜찮다 하면서.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말이 얼마나 편리하게 나를 침묵시키는 도구였는지를.
아이를 핑계 삼아 그는 여전히 내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그에게는 우리가 헤어진 이유가,
그가 한 선택들이,
이미 끝났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
나는 잠시 흔들렸다.
그 사람의 말 앞에 서면 내가 좋은 엄마가 맞는지 재단하고 의심하게 된다.
아니 그 사람의 말 앞에 서지 않아도 사실 스스로 항상 맞는지 의구심을 품고 있다.
내가 좋은 엄마가 맞을까?
하지만 나는 아이를 위해,
진짜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밤을 고민했고,
얼마나 조심스럽게 이 삶을 다시 일궜는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
나는 아이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이제 사랑하고 싶다.
그는 카톡으로 대답하지 않는 나에게 다시 물었다.
“애랑 단둘이 사는 집에 남자를 들이는 게 말이 되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았다.
정당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누군가의 허락 없이도 내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이와 나는 지금 함께 잘 지내고 있다.
안정적이고, 따뜻하고, 서로를 믿고 웃을 수 있는 날들이 많아졌다.
내 곁에 있는 사람도 아이를 소중히 여기며
아주 천천히, 한 걸음씩 우리와 거리를 좁혀오고 있다.
그것이 문제라면 그건 그 사람의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니다.
나는 누가 뭐라든 더 이상 그 말들에 휘둘리며 내 자격을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아이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충분히 좋은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