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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잃음 _ 그 모든 이를 위하여

그녀 이름은 서평

by 바람꽃 우동준

[그녀 이름은]



0.'그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행전 2,11)



1. 이름을 갖기 위하여


인류의 역사적 투쟁은 결국 자아로서의 이름을 얻기 위한 실존적 정신적 투쟁의 연속이었다. 무엇으로 불리고 싶은지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 인류의 역사를 오늘까지 이어왔다. 글의 시작은 성경의 한 구절이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행적을 전하기 위한 제자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지키고 싶던 건 하나.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 예수란 이름이었다.



2. 현존하는 이야기


'그녀 이름은'은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다양한 여성들이 겪었던 실제의 사건들을 재구성한 인터뷰집에 가깝다. 남성으로서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현실과, 젠더를 떠나 같은 시공간에서 경험한 공통의 현실이 있었다.


그곳은 지하. 소설 속 인물 뒤에 현존하는 여성의 공간과 나의 어린 시절의 공간이 이어지며 과거에 놓쳤던 다양한 순간들이 플래시백 된다.


반지하보다 낮은 곳. 아니 깊은 곳. 낮다는 표현도 땅 위에서만 사용되는 단어일 뿐 땅 속의 세상은 낮지 않고 오직 깊고 깊을 뿐이다. 그 깊은 곳에 살던 아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곰팡이 냄새로 지하에선 말릴 수 없던 빨래들. 하지만 태양 아래 지상에서도 말릴 수 없던 빨래들이다. 새 속옷은 놔둔 채 입었던 것만 사라지는 속옷. 그 쓰임도 분명치 않은 타인의 속옷은 기분 더러운 상상만을 남긴다.


반지하에서 살던 나의 기억과 추억은 아름답다. 세상을 보던 아주 작은 창과 낯선 사람들의 발. 그즈음의 난 닌자거북이를 좋아했었지. 매일의 아침이 닌자거북이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신발을 보며 어떻게 생긴 사람일지 그려보고 그의 하루를 상상하기도 했다. 늘 빨간 또각 구두와 고동색의 뾰족구두의 등장을 기다렸었다.


창 밖의 세상은 상상하기 쉬웠지만, 창 안의 세상 함께 하는 사람의 일상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햇살이 두는 곳에 빨래를 말리면 누군가 가져간다는 이야기. 지금보다도 어렸을 삼십 대의 어머니는 어땠을까. 홀로 어린 아들과 그보다도 어린 딸을 품어야 했던 그녀는 어땠을까. 같았겠지. 세상은 그때와 변하지 않았고 나는 자랐으니 나로 인해 자신의 이름을 상실한 그녀도 같았겠지.


내 빨래는 늘 뽀송했고 모든 빨래가 뽀송하고 온전할 줄 알았으니까.



3. 이름을 잃음


결혼과 동시에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성'을 다른 남성의 '성'으로 바꿔야 하는 서양과, 출산과 동시에 자신이 불리던 이름을 누구누구의 엄마란 역할과 기능적 수사로 바꿔야 하는 우리. 어디가 더 낫다 할 수 있을까.


책은 인터뷰이를 통해 나로서의 감정보다 늘 한 발 앞서 있는 엄마, 아내로서의 무게를 담담히 토해낸다. '남들과 똑같이'란 최대치의 압박을 가하면서 '남들'이란 사회적 그늘에 숨어 자신의 욕구를 숨겨왔던 비겁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근데 진명 아빠, 나 사실 좀 억울하고 답답하고 힘들고 그래. 울 아버지 딸, 당신 아내, 애들 엄마, 그리고 다시 수빈이 할머니가 됐어. 내 인생은 어디에 있을까.

아이고 벌써 시간이 일곱 시 반이네. 난 이제 밥해야겠다.》P.158



처절한 제로섬 게임이다. 결국 사랑하는 이에게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는 기나긴 인정투쟁. 사랑하는 존재가 생겼을 때 가장 약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누구여야 했을까.


계집에서 아내로 변화하는 언어는 모두 집이란 공통된 개념에서 파생된다. 공간적 의미로 붙여진 단어 계집과 아내. 여성의 세계를 집으로 한정시킨 남성은 되려 집을 떠날 수 없는 여성을 희화화했고, 세상으로 나선 여성에게 텃세를 부렸다.


어디 그리고 감히란 단어를 쓰며 그렇게 한 인간의 세계를 집으로 축소시켜 놓았다. 하지만 그 집의 소유가, 한 가정의 주인으로 여성이 '허락' 되기 까진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4. 이름을 넘어


재기해. 태일해.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된 이름이다. 남성 사회의 일원이란 공통점과 성 정체성으로 한 사람이 살아온 생은 사라지고 이름 또한 사라졌다. 그 사람이 걸어온 생과 선택에 대한 비난은 자유롭게 행해지되 그 사람이 지켜낸 이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 사람의 선택을 비난하는 것과 이름을 조롱거리로 만드는 것은 너무도 다른 차원의 공격이니까.


부계사회의 전유물인 성과 부모의 기대 혹은 점지자의 예지로 끼워 맞춰진 단어이지만 이 작은 조합 안엔 독립적이고 복합적인 사건과 역사가 있다. 스스로 채워간 많은 이야기가 있고, 관계 안에서 불려지고 기억되는 이름을 뛰어넘은 서사가 있다.


고인이 된 이름은 특히나 그렇다.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의 간절한 마음이 석자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름에 대한 집중을 넘어야 한다. 잃었던 이름에 대한 고백이, 잃은 이에 대한 추억을 조롱하는 것으로 행해지는 건 여러모로 아픈 일이다.


천주교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선포하고 기억하는 종교다. 오랜 시간 성체를 모셨지만 불태워진 성체 앞에 큰 분노가 느껴지진 않았다. 어떤 이는 모욕감을 느꼈다지만 난 그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저 아팠다. 예수의 성체를 불태워도 아무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행해야 할 실천적 도전은 이게 아니기 때문에 그저 아팠다. 성당을 불태우겠단 경고도 아무도 지킬 수 없다.


동시에 워마드와 메갈리아란 이름으로 모든 고백과 저항과 실천을 덮어버리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다. 보이는 것이 거대하기에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이 되지 않아 버렸지만 우리는 이름을 넘어야 한다. 페미니즘은 이제 불편하고 위협적인 사상이 되었지만 이 또한 그 이름을 넘어야 한다. 무엇이 페미니즘인지를 논할 동안 이름을 잃었던 이들의 삶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기에 이루어져야 할 실천이 남아 있다.


《처음 겪는 일이고 예상치 못했던 일이고 솔직히 무서웠다. 그때 노랫소리가 들렸다. 누가, 왜, 하필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제목도 가수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너무 잘 아는 노래였고 나도 자연스럽게 따라 불렀다.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 P. 175



4. 만인의 이름을 지키는 것이 투쟁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여기에 있다. 길을 함께 걸어가며 이 길 위에 있는 모든 이의 이름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이 책 안엔 국회 앞 농성을 했던 학교 조리사의 삶도 담겨있고, 여전히 진행 중인 ktx 승무원의 이야기와 언론파업을 했던 아나운서의 하루가 담겨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힘들었던 건 아래의 구절이다.



《안정된 상황에서의 생리는 별것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생리는 별것이 될 수도 있다.》P.196


생리대를 구하기 어려운 아이의 이야기이자 땅 속 지하에 사는 아이의 이야기였다.

지켜야 할 삶과 이름이 있다.

그리고

주님의 자비를 청하며 오늘 밤도 그 이름을 부르짖는 이들에게 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일 테다.



'그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행전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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