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를 보내고 나서야 실수를 깨달았다. 레이와 1년이 아니라 레이와 원년인데.. 숫자로 사고하는 연호에 대한 글을 쓰다보니 나도 모르게 레이와 1년이라고 써버렸다. 다음부턴 퇴고전에 꼭 점검하고 보내야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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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시간의 흐름을 짐작게 하는 여러 도구가 있다. 해의 위치로 시간의 흐름을 짐작하거나 달의 모양으로 반복 주기를 예측하기도 한다. 가장 보편적인 기준은 역시 ‘연도’일 것이다. 모두가 이 기준 위에서 추억하고, 행동하고, 계획한다. 그렇기에 역사 속에서 힘과 권력을 가졌던 이들은 모두 이 ‘시간의 기준’이 되기 위해 겨루었다. 무한한 시간의 주인이 되는 일은 곧 천하의 주인이 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서양 기준에 따라 올해를 2019년이라 부른다. 시간의 흐름에 좌표를 찍는 일은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올해지만 이슬람 문화에서는 마호메트의 메디나 이주 사건을 기준으로 히즈라 1440년, 대만에선 중화민국의 건국일로 민국 108년, 일본에선 새로운 일왕의 즉위로 레이와 1년이 됐다. 동일한 시간의 흐름이지만 기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계산된다.
그룹 트와이스의 멤버이자 일본인인 사나 씨가 새롭게 시작되는 자국의 연호를 맞으며 글을 올렸다. 이 짧은 문장으로 역사 인식 논란이 뜨겁게 달아올랐는데 그 과정이 여러 가지로 개운치 않다. 사나 씨는 SNS에 “헤이세이(平成)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헤이세이 시대가 끝난다는 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지만, 헤이세이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레이와(令和)라는 새로운 스타트를 향해 헤이세이의 마지막 날인 오늘을 상쾌한 하루로 만듭시다! 헤이세이 고마워, 레이와 잘 부탁해”라는 문장을 올렸는데, 여기서 사용된 연호가 ‘군국주의의 상징이자 일본 우익세력의 근간인 천황제에 대한 옹호’로 해석되어 뜻하지 않게 수많은 댓글을 견뎌내야 했다.
사나 씨는 1996년생이면서, 동시에 ‘헤이세이 8년생’이기도 하다. 일본은 이력서와 모든 공문서에 ‘연호’를 사용하고 있으니 연호가 바뀐다는 건 헤이세이 시대에 태어나 헤이세이 시대를 살아가던 시간이 과거가 됨을 의미한다. 앞자리의 숫자 하나가 바뀌어도 감정과 생각이 많아지는 우리가 아니던가. 사나 씨는 자신을 형성하던 하나의 정체성이 저무는 것을 보며 ‘헤이세이의 시공간에서 살아온 지난날’을 추억했지만, 누군가는 군국주의를 읽었고 우익 세력을 읽었으며 천황제에 대한 옹호를 읽어냈다.
우리에게 서력이 아닌 연호는 낯선 셈법이기에 ‘시간의 흐름’이 아닌, 어떤 시대에 어떤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단위’로 인식된다. 즉 ‘쇼와 시대’의 일왕이 헌법상의 군 통수권자로서 제국주의 전쟁을 이끌었던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645년부터 시작된 연호의 흐름 안에는 많은 시민의 다양한 이야기가 녹아 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 해결하지 못한 문제, 평화를 향한 열망과 변화의 계기가 동시에 담겼다. 쇼와에 이은 ‘헤이세이 시대’의 일왕만 하더라도 전후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아베 총리와는 달리 취임 후 지난 역사에 대한 사과와 평화의 메시지를 꾸준히 보냈었다. 연호는 곧 시간의 흐름이기에 단위의 사용을 문제 삼기보단 연호의 흐름 안에서 누가 어떻게 행동했느냐를 살펴야 한다.
철학자 이졸데 카림은 자신의 저서 ‘나와 타자들’에서 “우리는 가시성과 대의성을 구별해야 한다. 이들이 가시적이기는 하지만, 공공 영역과 중립적인 국가를 대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왕 탄신기념일에 참석했던 국회의원과 자위대 창설 기념식에 참여했던 국회의원들도 있었지만 가시성이 높은 대중가수라는 이유로 ‘사나 씨가 쓴 연호’는 더 많은 언론에 나왔고 더 엄중한 잣대로 평가받았다. 비난은 다시 힘이 있는 자가 아닌 약자를 향한다. 보이는 이들을 더 순수한 상징으로 만든다고 해서 우리의 대의성이 저절로 균형을 찾는 것은 아니다. 철학자의 말처럼 가시성이 아닌 대의성을 가진 이들에 의해 훼손되는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해와 분노는 함께할 수 있다. 차이에 대한 수용과 역사에 대한 기억도 함께 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식별이 필요하다. 무엇이 문화적인 차이며, 다름 속에서 지켜내야 할 가치인지 구별해야 한다. ‘맹목적인 수용’만큼 ‘전면적인 거부’ 또한 문제를 흐리고, 기억해야 할 아픔을 가린다. 일본의 레이와 1년이자 우리의 2019년이라 불릴 남은 시간을 무엇으로 채워갈지 함께 고민해야 할 때이다.
청년활동가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0&key=20190529.22029012627
출처: https://woodongjoon.com/103 [어제와 같은 하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