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서평] 비참함을 끌어안을 수 있는 건

중력과 은총 (시몬 베이유)

by 바람꽃 우동준

비참함을 끌어안을 수 있는 건

비참함을 끌어안을 수 있는 건

(중력과 은총 - 시몬베유)



포장되지 않은 고통, 때론 있는 그대로의 고통이 깊이 있는 희망을 끌어당긴다. 사실주의 화가였던 프란시스 그루버는 전쟁의 포화가 휩쓸던 1940년대 파리의 어느 골목에서 붓을 들었다. 발가벗고 피골이 상접한 인물이 폐허가 된 도시에 걸터앉아 상념에 잠겨있다. 무릎 위로 올린 앙상한 팔에 지친 머리를 기댄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 위론 ‘또 울음이 터져 나오려 하러지만 손으로 간신히 진정시키네.’라는 욥기의 구절이 보인다. 기도는 위를 향하고 눈물을 언제나 아래를 향한다. 역설. 약자가 가진 삶의 열망만큼 신의 응답은 따스하지 않았다.

<중력과 은총>은 시몬 베유의 사유가 담긴 철학책이다. 중력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인 동시에 밀어내는 상호적인 힘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필연적인 거리를 전제한다. 서로가 서로를 해치지 않을 거리, 곧 물러서는 것의 가치. 중력은 다가감의 필요를 말하면서도 물러섬의 필요를 상기시키기에 내가 그동안 신에게 느꼈던 낯선 거리감의 의미를 설명한다. 지구와 달이 지금보다 가까웠다면 달은 지구로 당겨져 지구도, 달도 모두 우주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이 거리는 서로를 지키기 위한 거리다. 중력은 서로를 놓지 않으면서 동시에 서로를 파괴하지 않을 거리에서만 작동하는 연약한 구속이었던 셈이다.



■ 비참함에 깃든 신성



허무와 고통만이 남은 세대에게 시몬베유는 <단지 우리의 비참함만이 신의 형상을 담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자신의 비참함을 응시하고 바라보는 것은 곧 신을 응시하고 바라보는 것> (p203) 이라고 말한다. 시몬 베유는 그렇게 개인이 감춰놓은 비참함에서 거룩한 신성을 꺼낸다. <중력과 은총>. 거스를 수 없는 힘과 쉬이 닿지 않는 신의 사랑이 결국 하나의 선으로 이어질 두 점이었음을 상기시키며 그녀는 우리를 중력의 세계로 초대한다.

시몬 베유는 비참함에 신의 형상이 담겨있음을 말한다. 겁 많은 우린 신의 뒤를 좇아 개인의 비참함을 꺼내 보지만 마주하는 건 지독한 현실뿐이다. <너무 큰 불행에 빠진 인간은 동정조차 받지 못한다. 혐오감, 두려움, 경멸이 있을 뿐이다.> (p14) 대부분의 비참함은 사회의 규정과 타인과의 비교에서 반사되는 감정이었다. 동시에 내 기도가 신에게 닿지 않음을, 혹은 너무 큰 고통으로 신에게 버려졌음을 짐작할 때 비참함은 어둠처럼 서서히 번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비참함의 의미를 찾는 과정은 상당한 용기를 요구하지만 꺼내진 비참함은 결국 동정받지 못한다. 나 역시 신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건 아닐까 두려워하며 같은 신앙을 가진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가 수용 가능한 수준의 고통만 발화되고 치유된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은 꺼내는 사람에게서도 듣는 사람에게서도 배제되어 왔다.


낙태죄 폐지를 청원한 23만명이란 숫자에 맞서 천주교의 반대 서명에는 총 100만 5천여명의 신자가 함께했다. 압도적인 수의 차이는 비참한 이를 향한 노골적인 배제로 쌓아 올렸다. 미사가 채 끝나기도 전 낙태죄의 정당성을 말하고 서명의 책임을 요구할 때에 여전히 ‘낙태의 상처를 지닌 자매와 형제’들은 교회 안에서 동정받지 못했다. 서명 기간 동안 우리가 지녔던 건 약한 생명을 지키지 않았다는 혐오감과 낙태죄 폐지 주장을 하는 이들에 대한 옅은 경멸뿐이다.


작고 여린 생명이 살아남는 것의 의미만큼 그 아이와 어머니가 앞으로 살아내야 할 삶의 무게도 함께 이야기되어야 했지만 우린 그러질 못했다. 생의 태어남은 곧 중력으로의 귀속이고 이는 개인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필연의 고통을 상징하는 것임에도. 모든 생명의 시작이 보호받아야 하듯이 모든 생의 삶도 보호받아야 하지만 출생 이후의 책임은 오롯이 개인의 능력으로만 치환한다. 세상의 논리와 교회의 시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리 개운치 않았던 생명을 향한 외침이다.



■ 중력장이 휘어지는 경험



<시선을 고정시키면 결국 환상이 사라지고 실재가 나타난다.> (p200) 우리가 서로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을 때 허상은 사라지고 실재가, 즉 진정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 드러난다. 수많은 사람이 돌을 던지려 했던 여인 앞에서 예수님은 한참 동안 땅에 시선을 고정하셨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했던 신은 출신 지방도 성별도 아닌 우물가 옆에 앉은 존재 그녀에게만 시선을 고정하셨다. 이 짧은 대화의 건넴이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중력장이 휘어지는 경험이었을 테다. 자신을 옭아매던 그 모든 사회적 압력이 휘어지는 낯선 존재가 건넨 해방의 물음. 세상 속에서 교회는 이런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찬란한 환상을 거두고 잔인한 실재를 마주할 수 있는 연습의 공간 말이다.


<우리의 비참함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하는 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상상적이다.> (p163) 그녀는 비참함에서 인간 존재의 실재를 증명한다.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가 비참함의 가치를 좇고, 인간이 비참함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죄’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중력을 거스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결국 비참했음을. 비참함이 개인의 추함과 무능력과 부끄러움과 결함이 아님을. 그것이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었을 말하며 시몬 베유는 당당히 비참함의 가치를 재정립한다.


모두가 거스를 수 없다는 명제는 인간을 동일 선상에 올려놓으며 개인에게 특별한 겸손을 요구한다. 나라고 다를 것이 없단 얘기다. 인간에게 중력은 필연적이기에 중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죄도 무능력도 아니다. 하지만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죄이다. 신은 인간의 비참함을 존재의 입에서 꺼내지 않으시고, 직접 비참함의 한복판으로 내려오셔서 함께 하셨다. 주님이 골고타 언덕에서 느꼈던 고통은 십자가 나무가 지닌 본연의 중력에 기인하고, 육화한 신의 고통은 중력을 벗어날 수 없는 가여운 인간 현실의 한복판으로 들어오신 거룩한 신비이자 따스한 자비 곧 일치다.


하지만 우린 이런 비참함의 신비를 외면한다. 중력은 인간적이고 초월은 신적이다. 우리에게 은총이란 중력에서 벗어남을 뜻했고 비참함과 멀어질수록 신과 가까이 닿는다 믿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것과 더 빨리 내달리는 것이 성공이 된 시대. <부자나 권력자들은 인간의 비참함을 알기 어렵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스스로가 중요한 존재라고 믿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 역시 인간이 비참함을 알기 어렵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부자와 권력자가 중요한 존재라고 믿기 때문이다.> (p203) 땅의 중력에서 해방돼 저 높은 빌딩의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라고, 땅과 가깝거나 땅속으로 들어갈수록 하느님의 외면을 받은 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우리를 겸손케 하는 삶의 비참함을 왜곡한다. 신은 비참함에 깃들었지만, 어둠을 거부하는 모순은 우리를 더 고립되고 외롭게 만들었다. 개인의 당연한 어둠이 서로에게서 꺼내지지 않자 내게 있는 어둠이 더 유별나 보이고 더 어두워 보이기 시작한다.



■ 우리가 가난해지기 위해선



비참함을 거부할수록 가난한 삶에 대한 희망도 요원해진다. 비참함을 받아들이지 못한 가난에 남는 건 허울뿐이다. 교회의 첨탑은 금빛으로 빛나고 빛이 드는 교회의 중심 자리는 가난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 채운다. 교회가 가난한지는 물었지만 비참한지는 묻지 않았기에 회장과 대표의 직함은 교회 안에서도 그 영광을 잃지 않았다. 시몬베유는 말한다. <지렛대. 올리고 싶을 때는 낮출 것.> (p158) 세상 속에서 인간의 비참함을 소중히 여길 때에야 교회는 높아질 것이다. 여전히 십자가 위에서 중력의 고통을 느끼는 신의 육신은 못 박힘의 인간적 고통을 매 순간 상기시킨다. 지금 우리의 교회는 실재하는 진실과는 다른, 상상적인 모습을 쫓고 있는 건 아닐까 엄중히 자문해보자.


베유는 우리의 비참함이 신과 닮았다고 말하며 <욕망과 폭력에 휩싸이지 않으려면 우리 자신에게 폭력적이어야 한다. 스스로에 대해 힘을 행사해야 한다> (p207)고 말하지만, 이는 쉽지 않다.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무언갈 더 꼭 쥐게 되는 것은 인간의 약한 본성이다. 없음을 깨닫는 순간 작은 것에 대한 욕망은 더욱 거세지고 내 앞에 있는 것에 대한 강한 관성을 수반한다. 이는 단순한 물질이 아닌 시간적 개념에서도 동일하다. 미래를 빼앗기는 건 빈자리의 생성이고, 이는 균형의 상실을 야기한다.


제시되지 않은 미래는 빼앗긴 미래와 같다. 끼니를 해결하기 벅찬 홀로 사는 노인들이, 신체의 불편함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이웃들이, 교통비를 지원받기 위한 구직 청년들이 그랬다. 전망이 보이지 않는 미래는 공허한 시간의 빈자리를 만들고 이 빈자리의 진공은 자신을 포함해 모든 것을 거세게 빨아들인다. 비참함이 신의 형상을 담았다는 시몬 베유의 말이 이런 뜻이었을까. 이웃들의 조각난 시간. 인간적인 비참함의 색채를 지운 교회에 빈자리는 어디에 있는지 되묻고 기꺼이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누구를 위해 빈자리를 마련해두었는가. 비참한 개인들이 교회로 모여들지만, 그들을 위해 준비된 자리는 없다 .


많은 것이 달라져야 하지만 비참함이 꺼내지는 과정부터 점검해야 할 것이다. 늘 그렇듯 우리가 비참함을 드러내야 했던 경험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교회에서 꺼내지는 개인의 비참함은 그 어떤 곳보다도 아프다. 타인의 도움을 받기 위해선 나의 고통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과정이 남아있다. 이는 금액 대신 지불해야 하는 자존감이다. 완전한 약자가 되어야 비참한 현실에 대한 동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비참한 이들이 내놓은 자존감으로, 도움 주는 이의 자존감을 세웠던 드러나지 않은 비열한 거래의 방식이다. 신성이 깃든 비참함, 그 감정의 본질에 집중하지 않았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 고통으로부터 피어나는 희망의 심연



<아무리 줄이려고 해도 줄일 수 없는 나의 고통의 밑바닥.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나. 이러한 나를 보편적인 존재로 만들 것> (p234)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느냐는 질문은 지금 내 곁에 깃든 신의 사랑을 밀어낸다. 교회는 말해야 한다. 당신이 처한 고통의 상황은 당신이 잘못해서도 아니고 유별나서도 아니며, 지금이 바로 신의 사랑을 받은 인간 생의 보편적 모습이라고. 그리고 우리 또한 다르지 않기에 그 고통에 동참하겠다고. <불가능에 접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것을 완수해야 한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이 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온다.> (p205, 199)부끄러움과 모멸감 없이 배고픔과 목마름을 고백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의 실천이자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사랑의 완성이다.


우리의 신은 중력을 오롯이 체험하신 분이었다. 십자가 지심을 통해 십자가 위의 못 박힘을 통해 온몸을 짓누르는 중력의 고통을 느끼고 증명하셨다. <인간의 비참함으로부터 신을 향하여. 그러나 보상이나 위안으로서가 아니라 상호적인 관계로서> (p155) 가장 낮은 곳을 향하는 중력과 가장 높은 곳을 향하는 은총. 낮은 곳을 향한 끌어당김은 비어야지 채워질 수 있음을, 어둠에서 빛을, 비참함에서 신성을 이끌 수 있다는 역설을 담고 있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 그리스도도 심판하지 않는다... 모든 심판은 심판하는 자를 심판한다. 심판하지 말 것. 그것은 무관심이나 회피가 아니라 초월적 심판이며, 우리가 할 수 없는 신의 심판에 대한 모방이다.> (p225) 비참함을 쫓기 위해 우리가 갖춰야 할 것은 차별 없이 상대를 바라보는 일이다. 곁에서 기도하는 이웃의 옷과 냄새와 머리 매무새, 외양이 아닌 그 사람이 거쳐 왔을 삶의 중력을 짐작해보자. 높고 낮으므로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아닌 주님이 깃든 이웃의 비참함을 살펴보자.


‘또 울음이 터져 나오려 하지만 손으로 간신히 진정시키네.’ 우연히 미술관에서 마주한 프란시스 그루버의 그림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전쟁의 역사 안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눌러야만 했던 그를 보며 따스한 봄의 울음을 간직했던 4월과 5월의 이웃들, 내 주변의 수많은 ‘욥’을 기억한다. 공장노동자로 교사로 억압받는 이를 위해 유럽을 떠돌았던 시몬 베유의 사유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긴다. 아마 내일도 기도는 위를 향하고 눈물을 아래를 향할 테지만 눈물이 고일 그곳에 빛의 은총이 머물 것을 안다. 이제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 것인지 차분히 고민해보자. 중력과 은총의 신비 안에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