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매니저란 정체성으로 제가 담당한 첫 번째 콘텐츠는 <철학 반찬>입니다. 철학 반찬의 시작은 지난 연말, 안부를 묻기 위해 만났던 가벼운 자리가 그 시작이었는데요. 과거 청년단체를 운영할 때 만났던 동생의 반가운 전화로 부산 동래에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답니다. 그러니까 지금 진행하는 <철학 반찬>은 이어진 옛 관계의 안부를 묻다 서로에게서 나온 아이디어인 셈이지요. 동생은 과거 '아토'라는 이름으로 봉사동아리를 만들어 마산에서 활동했었고, 조금은 순수해 보였고 조금은 꿈에 가득 찬 모습이 인상적이던 동생이었습니다. 지역 대학이 취업률을 근거로 철학과를 없애던 시절 마지막까지 남아 꾸준히 학문을 쫒던 친구이기도 했지요.
어찌 지냈냐는 물음에 아토는 대학원에 진학해 계속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합니다. 저는 지역의 선배들과 함께 새로운 공간을 오픈했다고 전했습니다. 길을 걸으며 조금씩 헤매기도 하지만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우리 둘. 이렇게 느슨하지만 꾸준히 이어지는 관계가 좋았습니다.
과거의 사건을 함께 되짚으며 웃고 그리워하다 다음 질문은 자연스레 요즘의 고민으로 옮겨갔고, 아토는 곧 춘천에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했습니다. '철학카페'라는 프로그램인데 철학의 대중화를 위한 실천 운동 중 하나라고 했지요. 자신이 좋아하는 철학을 놓치지 않고 학당을 넘어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이 신기해 그 움직임에 동행하고 싶기도 했고, 과거 맞추었던 호흡을 지금이라면 다시 이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강점을 중심으로 새롭게 아이디어를 섞어 <철학 반찬>이, '철학카페'라는 하나의 실천운동을 베이스로 삼아 새롭게 조합한 <철학 반찬>이 탄생하였습니다.
우리의 강점
① [공간] 4구 가스레인지와 2단 가스 오븐 (각종 주방 설비)
기존의 철학카페는 대학교수와 전공자를 중심으로 대화가 진행되니 어려운 면도 있었고 심리적 문턱이 높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린 제가 있는 공간의 도구를 활용해 '요리'와 '소셜다이닝'을 섞어보기로 했지요. 마침 아토는 오랜 자취의 경험을 바탕으로 요리 실력이 상당했고, 또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친구라 자신 있게 철학에 '요리'라는 아이템을 섞어보기로 했습니다. 메인 셰프는 아토가, 장보기-설거지-요리 보조는 매니저인 제가 하기로 했지요.
철학카페에 소셜다이닝의 개념이 섞이니 이름부터 바꿔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몇 가지 논의를 거치다 최종안은 '철학 밥상'과 '철학 반찬'으로 좁혀졌고, 우린 오늘 당장 정하지 말고 조금 더 고민해보자고 했지요.
각자의 시간을 가진 뒤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는데요. 결국 '철학'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팽팽하게 갈라지던 답이 좁혀졌습니다. 우리는 '철학'이 아닌 '서로를 만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목적이었고, 철학을 쫓지 않고 도구로 삼아 즐겁게 대화해보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죠. 결국 '밥상'이 아닌 '반찬'이 최종 프로그램이 되어 우리의 지향을 담은 프로그램 명이 탄생했습니다. 그렇게 이름에 따라 우린 열심히 밥을 준비하고, 철학을 반찬삼아 함께 대화하며 밥을 먹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② [사람] 각자가 걸어온 다른 삶
타인과 만나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며 대화하던 저와, 계산적이지 않고 순수한 가치를 가진 아토는 타인에게 해석되는 모습도 각자가 설정할 수 있던 캐릭터도 확연히 달랐습니다. 철학을 전공한 아토와, 대학을 중퇴하고 시민운동계열에서 활동했던 저는 각자가 주로 쓰는 언어도 달랐고 목소리의 톤도 달랐지요. 덕분에 프로그램의 기획 단계부터 각자의 롤을 구분하여 프로그램을 설계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환대하고, 대화에 초대하는 <촉진자> 역할을 제가 맡기로 하고, 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진정성 있게 대화에 집중하는 <진행자>의 역할을 아토가 맡기로 했지요. 서로의 역할을 구분하고 호흡을 맞추는 과정을 이제 다섯 번 정도 거쳤습니다. 처음엔 각자 설정한 촉진자와 진행자의 몫을 소화하기 버거워 낯 뜨거운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고, 대화의 공백이 길어지는 아찔한 상황도 발생했지만 이젠 어느 정도 제 몫을 이해하고 상대의 호흡을 살펴볼 수 있는 여유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다른 삶에서 각자의 장점을 뽑아내고 자신이 제일 잘할 수 있는 역할을 분담하는 경험은 제게도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대표라는 직함을 가진 채 모든 걸 내가 책임지고 홀로 해내야 했던 흐름에서 하나의 몫을 떼어내 상대에게 온전히 의지하는 경험은 제게도 큰 도전이자 배움이었지요.
결국 서로가 걸어온 다른 삶을 인정하면서 동행하는 과정이 철학 반찬의 다양한 장치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인지의 장막'을 통해 서로의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묻지 않고 오늘 이 자리에서의 닉네임과 서로의 감정만 의지하며 대화를 하는 등 얼핏 보면 번잡하고 불필요해 보이는 장치들도 우리의 시작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시작되었기에 가능한 것들이었습니다.
철학 반찬은 이제 5회를 지나 6회를 향해 나아갑니다. 19년 1월에 시작했으니 꼬박 6개월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도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철학 반찬>을 통해 형성된 새로운 커뮤니티에서 자발적으로 여름 엠티를 꺼내기도 하고, 더 긴 시간의 프로그램을 제안하기도 하니 이젠 아토와 제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다듬어가는 커뮤니티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커뮤니티 매니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처음 시작한 만큼 많은 애정과 아쉬움이 담긴 <철학 반찬>. 다음 프로그램에선 참석자가 준비된 요리를 먹는 것이 아닌, 함께 요리를 만드는 것으로 새로운 라포 형성을 시도해보려 합니다. 이처럼 매 순간 실험하며 유연하게, 또 양보할 수 없는 가치는 꾸준히 지켜가며 새로운 커뮤니티를 만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