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문화기획자, 공간매니저, 출판편집자의 술자리

멀리서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람과 동료가 되는 기분은 뭔가 짜릿했다

by 박정오

접수 마감이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니 마음이 더욱 조급해진다. 이러다 제시간에 제출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손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동준 씨, 이 서류 폰으로 좀 찍어서 보내주세요! 도저히 혼자서는 제때 끝낼 자신이 없어 공간 매니저 형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서류를 최종 점검한다. 혹시 잘못 기재된 사항은 없는지, 빈칸은 없는지, 제출해야 하는 서류를 빠짐없이 준비했는지. 이 와중에도 치명적인 오탈자가 없나, 띄어쓰기 잘못된 건 없나 체크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이보게, 이건 최종 교정·교열이 아니라 마감 기한 내에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공모사업일세.


마감이 5분 앞으로 다가왔다. 마침 공간 매니저 형에게 부탁한 사진도 무사히 전달받았다. 이제는 정말, 제출해야 한다. 그래도 혹시 빠뜨린 게 있을까 싶어 공모 요강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기로 한다. 참가 신청서에 직인을 찍어서 제출해라는 문구를 확인한다. 젠장, 이걸 왜 이제 봤지. 급하게 직인 이미지 파일을 찾는다. 공모사업 기획서를 쓸 때 간혹 사용했었는데, 파일이 왜 안 보이지. 마감 2분 전. 가까스로 파일을 찾았다. 제출서류를 마무리한다. 메일을 보낸다. 전송 완료가 뜨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시간을 확인한다. 아슬하게 세이프? 아니다. 2분 늦었다. 온몸에 힘이 빠진다. 아...


홀에 나오니 공간 대표님과 매니저 형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시간에 제출했다고 거짓말할까. 2분 늦은 거 때문에 떨어지진 않겠지. 설사 떨어진다 해도 기획서가 안 좋았다고 핑계 댈 수 있지 않은가. 제출했어요? 대표님이 물어본다. 네, 그런데... 결국 이실직고하기로 한다. 2분 늦었습니다. 최종 점검하고 빠뜨린 거 보충하다 보니... 늦었다고요? 미리미리 좀 하시지. 대표님의 핀잔에 괜히 욱한다. 안 그래도 회사 업무도 많은데, 시간 내서 겨우 한 겁니다. 그럼 회사 시스템이 문제네요 대표님의 말에 맞장구친다. 그렇게, 서로를 탓하기보다 공공의 적을 만들며 화기애애하게 마무리한다. 급하게 공모사업 기획서를 써서 제출한다고 다들 힘이 빠진 것 같다. 결국 미리미리 준비하면 될 것을, 어째서 마감일이 되어서야 아슬아슬하게 마무리하는가. 다들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들이니 어쩔 수 없는 걸까. 뒤에 약속 있습니까? 셋이서 저녁이나 같이 먹죠. 공간 대표님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다. 똥줄 태우며 일 하나를 마무리했는데, 이대로 집에 가긴 아쉽다. 공모사업에 붙을지 떨어질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수고했으니 소박한 만찬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

닭갈비가 생각보다 맵다. 그래서인지 맥주가 쑥쑥 들어간다. 문화기획자와 공간 매니저, 출판 편집자, 세 명이 모인 술자리. 예상한 것처럼 고상한 이야기가 오간다. 뭔가 재미난 아이템 없을까, 어떻게 하면 공간에 손님이 많이 올까, 이런저런 공모사업이 떴는데 괜찮은 기획안 없을까. 이거 원, 회의도 아니고...


맥주 몇 잔이 들어가자 옛날얘기로 빠진다. 나 처음 대표님 봤을 때 사기꾼인줄 알았잖아! 매니저 형이 낄낄거리며 얘기한다. 다섯 번 정도는 들었던 거 같은데. 저는 삼 년 전에 대표님 처음 봤을 때, ‘문화기획자’라고 자기를 소개해서 뭔가 아우라가 느껴졌던 거 같네요. 나 역시 네 번 정도는 했을 얘기를 다시 한다. 취업 문제로 한창 힘들 때 무작정 대표님 찾아가서 진로 상담도 했었는데, 그게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네요! 아마 이 얘기는 세 번 정도 한 거 같다. 공간 대표님도 입을 연다. 예전에 문화기획 활동을 하다가 SNS 상으로 저격글을 썼던 얘기다. 이거는 거짓말 안 하고 여섯 번째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매니저 형은 처음 듣는 것마냥 깜짝 놀란다. 저기요 형, 저번에 들었던 얘기인데요?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꾹 참는다. 뭐, 또 듣는 것도 나쁘진 않다. 오랜만에 들으니 새롭기도 하고 또 재밌다.


대표님의 얘기는 이내 부산 문화예술판에 대한 비판으로 향한다. 이 사람은 어떻고, 저 단체는 어떻고, 그래서 문제라는 말. 역시나 이분, 피가 항상 끓어오르는 것 같다. 처음 봤을 땐 얌전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첫인상과 너무 다르다. 주변에 글 잘 쓰는 사람 좀 없습니까? 아주 부자연스럽게 딴 얘기로 넘어간다. 이제 슬슬 세 번째 책임편집 책을 준비해야 하는데, 아직 잘 안 보이네요. 이내 한 명을 즉석에서 추천받는다. 곧장 휴대폰으로 그 사람이 쓴 글을 읽는다. 그동안 두 명은 또 딴 얘기를 한다. 술자리는 이토록 정신없이 흘러간다.


별것 아닌 일로 한창 논쟁 중인 두 명을 바라본다. 한 명은 처음 만났을 때 내게 ‘문화기획자’라는 환상을 심어줬던 분이다. 문화기획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나 역시 험난한 길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무지하게 힘들었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될까? 다른 한 명은 나와 캐릭터가 비슷해서 예전부터 궁금했던 사람이다. 활동 영역은 비슷했지만 시기가 달라 항상 어긋나곤 했는데, 공간을 함께 사용하게 되면서 드디어 접점이 생겼다.


불과 2~3년 전만 하더라도 참 멀게 느껴졌던 이들과 이렇게 편하게 술 한 잔 하고 있는 상황이 문득 신기하게 다가왔다. 멀리서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람과 동료가 되는 기분은 뭔가 짜릿했다. 아직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가는 것도 벅차지만, 미약하게나마 걸음을 맞추고 있긴 했다. 그렇게, 막연하게 품었던 이상이 언젠가부터 현실이 되었다. 20대의 끝자락에 꽤 강렬하고, 또 소중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

- 오늘은 제가 내겠습니다!


매니저 형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당당히 외친다. 에이, 진짜 낼 거면 몰래 계산했어야죠.


- 기획서 열심히 쓰고 간단하게 한잔한 건데, 회사 카드로 결제하죠.


회사 카드에 돈이 얼마 없다는데, 결제가 되려나.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지금이야 공간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독특하고 신선한 프로그램 과 행사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데만 집중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흥미 위주로 실험만 할 순 없었다. 초기 자금이 떨어지면 당장 월급을 줄 수 없게 된다. 아무리 하고 싶은 걸 한다 해도 돈이 없으면 지속할 수 없다. 지금의 이 재미나고 평화로운 일상에 취해 있기엔, 현실의 무게는 만만치 않다. 하, 먹고 산다는 게 이토록 힘들구나! 아무튼 공모사업에 꼭 붙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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