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아침 업로드된 칼럼. 부디 우리 사회의 산적한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나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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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들이 모인 익숙한 풍경의 모임이었다. 또 한 번의 권력이 바뀌는 시기, 앞으로의 부산을 위해 다양한 고민을 나누는 자리였다. 두 시간 남짓한 동안 늘 듣던 위기와 추상적인 해결법이 나왔고 언제나 그렇듯 진단은 분명했다. 제2의 수도였던 부산이 몇 년째 사망자가 출생자보다 많은 지역이라는 명확한 데이터, 이러다간 정말 지역이 소멸한다는 분명한 미래였다.
멍하니 앉아 이야기만 듣던 내게 누군가 요청했다. 청년이 대체 어떤 어려움 때문에 결혼을 망설이는지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거였다. 질문의 형태를 띠었지만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마치 지역소멸이 청년의 낮은 혼인율에서 비롯된다는 듯한 뉘앙스, 문제가 분명한데도 왜 앞서서 해결하지 않느냐는 메시지에 차분히 데이터 너머의 이야기를 전했다.
나와 오래 신앙을 공유한 동료가 있다. 그는 얼마 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하루빨리 결혼하고 함께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특유의 신중함과는 다른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미래를 꿈꾸는 모습에 마치 나의 일처럼 설레고 기뻤다.
하지만 지역 관광산업계의 넉넉지 않은 임금으로 결혼을 계획하려면 모든 변수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는 내게 한 선배 이야기를 전했다. 정부 지원정책으로 전셋집을 구했지만, 너무 높아진 가격에 갈 곳을 잃은 신혼부부였다.
그들은 새로운 삶을 꾸린 동네에 계속 머물고 싶었지만, 과거의 가격을 기억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4년이면 어느 정도 목돈을 모을 수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저축률을 높여도 시장 가격을 따라잡을 순 없었다. 출퇴근 시간을 지키려면 늘어난 살림에 비해 훨씬 작은 아파트로 가야 했고, 가격을 유지하려면 버스나 지하철을 3번 환승하는 일상을 택해야 했다. 4년은 너무 빨랐고, 그 사이 정부 정책은 너무 많이 달라졌다. 공공 시스템에 깊게 연결된 이들일수록 대응은 더딜 수밖에 없었고 정부 대책의 작은 변화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일상을 휘청이게 했다.
결국 동료는 올해 안에 하고 싶다는 결혼을 미뤘다. 내년이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나오는 건 아니겠지만, 당장 손에 들고 있는 현금을 두텁게 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했다. 삶의 회복 탄력성을 높이기 위해 시스템에 의지하지 않겠다는 동료의 말이 나는 어느 정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또 오랜 취업준비생 시절을 끝내고 드디어 공기업 취업을 해낸 친구가 있다. 그는 틈틈이 타인과 교제해왔지만, 앞으로도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선을 그어 말했다. 홀로 남을 어머니가 감당할 이자와 월세가 남았기에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장에 취업해도, 여전히 자기 삶의 문제가 끝나지 않은 친구였다. 그에게 결혼은 삶의 다음 단계도, 마냥 행복하기만 한 미래도 아니었다. 언제나 타인을 살뜰히 챙기는 친구였기에 자신과 어머니의 삶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다는 말 역시 이해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의지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로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길 망설이는 청년은 훨씬 많다. 지루한 토론 자리에서 동료의 사례를 통해 말하고 싶던 건 단순했다. 청년을 통해 문제가 드러난다고 해서 ‘청년이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논의의 주요 파트너를 문제로 삼는 순간 해결 가능성은 사라진다. 이건 다른 사회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1인 여성 가구를 노린 생활 범죄가 많다고 해서 1인 여성 가구의 느슨한 경계심이 문제가 아니고, 생산직 노동자의 안전사고가 자주 발생한다고 해서 그들의 낮은 주의력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건 마치 생태계 사슬을 통해 독성물질이 농축되듯 앞서 풀지 못한 사회의 매듭이 뒤엉켜 여린 사회구성원이 나아갈 물길을 꽉 막고 있는 모습과 같다.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물은 흐르지 않고 생태계는 복원되지 않는다.
다음 주면 또 한 번의 큰 물길이 바뀐다. 아마 5년 전 그랬던 것처럼 흘러왔던 물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혀 다른 물길을 파헤쳐 흙탕물이 아래로 흘러 내려올 것이다. 지역소멸을 막기 위한다면 지역에 영향을 주는 외부의 시도를 보아야 하고, 청년들의 문제를 풀기 위해선 청년 이전의 선택을 살펴야 할 것이다.
이제 누구를 바라볼 것인가. 물길이 막혀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을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늘 해오던 정책을 반복하며 새롭다 말하는 이들을 바라볼 것인가. 매듭을 풀기 위한 책임과 변화를 누구에게 요구할지 고민해야 할 순간이다.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700&key=20220302.22021000239&kid=023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