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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꽃 우동준 Aug 18. 2021

[청년의 소리] 그 과녁이 아니다

국제신문 칼럼

http://www.kookje.co.kr/mobile/view.asp?gbn=v&code=1700&key=20210818.22021004426


평소 운동에 이렇다 할 흥미가 없지만, 올림픽만큼은 개막식부터 폐막식까지 동계와 하계를 구분하지 않고 꼭 챙겨보는 편이다. 여러 종목 중에서도 동계에선 피겨와 스키점프, 하계에선 높이뛰기와 양궁을 좋아한다. 승자와 패자로 이분화된 결과보단 오랜 시간 애써온 모든 선수의 노력이 기록되는 종목에 ‘응원할 맛’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게 승리보다 중요한 서사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에 있다. 이들 종목은 심판의 눈을 속여가며 과장된 액션을 할 필요도 없고, 상대를 위축시키려 의도적으로 거친 파울을 할 이유도 없다. 그저 내가 늘 연습해왔던 대로 나의 호흡과 몸이 기억하는 감각에만 오롯이 집중하면 된다.



사실 올림픽은 1등을 뽑는 게임이기보단 모든 스포츠 선수들의 무한한 ‘자기 극복’과 ‘기록 경신’의 장에 가깝다. 금메달리스트도 무거운 메달과 함께 신기록이라는 새로운 한계와 마주하기 때문이다. 각자의 기록을 경신하는 스포츠 축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무엇보다 ‘공정한 룰’의 적용일 것이다. 여기서 공정은 ‘승자의 혜택’과 ‘패자의 비용’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공정은 자신이 쌓아온 기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선수가 집중할 수 있는 환경과 온전한 기회를 내어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장대높이뛰기에선 1차 시도에 장대가 부러지더라도 실패로 판정하지 않는다. 타인의 장대를 빌려서라도 자신의 기록에 도전할 수 있도록 또 한 번의 기회를 보장한다. 이처럼 스포츠에서의 공정은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공평한 무대를 제공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나는 외적인 조건만으로 게임에 참여할 기회 자체를 박탈하거나 혹은 선수의 진지한 도전을 방해하는 움직임이 있을 때 이를 ‘불공정’하다고 여긴다. 그럼 이번 올림픽에서 ‘불공정’이란 단어와 가장 맞닿아있던 선수는 누구였을까. 양궁의 안산 선수는 첫 번째 금메달을 따고 난 뒤 남은 올림픽 경기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수많은 누리꾼들로부터 ‘너도 페미니스트냐’는 거친 질문을 받았다. 정확한 입장이 무엇인지 자신이 직접 밝히라며 종국엔 마치 입장을 밝히지 않아 문제가 더욱 불거지는 것처럼 호도하기도 했다.



그들은 ‘머리카락의 길이’ ‘특정한 단어의 사용 빈도’가 굉장히 신뢰도 높은 지표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뢰도가 높다고 해서 그 주장의 타당도까지 함께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 두 개는 다른 차원의 논의였지만, 모두가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만 주목하고 논쟁의 타당도를 따지지 못했다. 그사이 기다렸다는 듯 페미니스트 유명인을 기록한 사이트도 등장했다. ‘의심’ ‘선봉’ ‘확정’이란 카테고리를 나눠 정치인과 문화예술인을 노골적으로 겨냥한 리스트였다.



우리 사회는 이미 사람을 향해선 활시위를 당기지 않는다고 합의했지만, 이처럼 곳곳에서 사람을 다시 과녁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의 논의는 더 이상 담론의 경기장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한국 사회라는 경기장에서 누군가를 밀어내려는 움직임이며, 성에 따라, 국가에 따라, 피부색에 따라 기회의 격차를 당당히 마련하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이다. 우리의 진짜 과녁이 여기에 있다.



일상화된 권력 구조엔 둔감하고, 조롱의 언어에는 민감해진 사이 이 불공정하고 왜곡된 질서는 여전히, 계속해서, 끊임없이 작동한다. 내게 승리보다 중요한 서사는 여전히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며 승자와 패자가 아닌 ‘자기 극복’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올림픽에서 우린 멀리서 바라보는 관람객이었지만, 일상이란 경기장 위에선 모두가 같은 룰 위에 놓인 자기 삶의 대표 선수다.



그렇기에 이젠 관망의 태도를 넘어서자. 상대를 위축시키려는 의도적인 공격과 규정, 거친 폭력을 일삼는 언어에 함께 맞서 목소리를 내자. 이제 한 개인에게 낙인찍듯 가해지는 전방위적인 압박과 공격적인 규정이 공정하지도, 타당하지도 않다고 함께 말해야 할 때다. 시간의 흐름이 곧 진보로 이어지진 않기에 그 누구도 자신의 경기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우리 사회의 룰을 토론하고 점검하며 지켜내야 할 때다.



청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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