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봄 햇살이 아쉬워 가볍게 동네를 걷다 작은 놀이터를 발견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황량한 놀이터. 멍하니 앉아 빈 놀이기구만 바라보다 두 개의 그네, 두 개의 시소, 두 개의 철봉, 완벽히 둘로 짝지어진 세계를 보았다. 불현듯 다가오는 생경함과 스산함. 분명 어린 시절엔 셋 혹은 다섯 그렇게 삼삼오오 무리 지어 매달리던 기구들이 있었는데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다 같이 붙어 동시에 오르기도 하고 건너가기도 하며 서로의 세계를 탐험했던 정글짐이나 구름다리는 전부 어디로 가버린 걸까.
나는 놀이터에서도 정글짐을 가장 좋아했다. 내 마음대로 어느 방향이든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었고, 다리를 길게 뻗어도 좁게 당겨도 충분히 디딜 수 있는 봉이 있었다. 정글짐은 입구도 없고, 출구도 없는, 각자가 선택한 길이 모두 정답이자 모든 매달림이 놀이가 되는 기구였다. 유난히 작고 약했던 내가 마음껏 이동할 수 있던 정글짐은 가장 강렬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세계, 바로 그 자체였다.
그랬던 아이가 어느덧 시간이 흘러 청년이 되었다. 나는 어린 시절 정글짐을 누볐던 것처럼 나의 세계를 짐작하기 위해 허우적거리며 열심히 손과 다리를 뻗었다. 그런데도 마땅히 디딜만한 곳을 찾지 못했고, 법적으로 자유와 책임이 보장된 성인이 되었지만 어린 시절 맛본 자유는 점차 요원해져만 갔다. 훨씬 커진 몸과 피 마른 머리로도 도통 다음에 디딜 봉이 보이지 않았고, 그렇게 한참을 더듬거리다 겨우 닿은 곳이 청년공간이라 호명되는 부산 내 창업카페, 두드림센터, 창조발전소였다.
지쳐 도착한 내게 그들은 ‘무슨 아이템으로 창업할 것인지’, ‘어떤 직무로 취업하고 싶은지’,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물었다. 청년을 위한 공간에서 마주한 건 멈추지 말고 다시 오르라는 주문이자 더 빠르게 오르기 위해 다음에 어떤 봉을 밟아야 하는지에 대한 계산이었다. 청년으로 입장해 지역을 빛낼 창업자, 당당한 취업자 혹은 창조력을 뽐내는 크리에이터로 되돌아 나오는 세계, 그곳에서 청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닌 여물지 못한 과정의 일환이었다.
상승과 하강, 오직 종으로만 구분된 세계에는 그림자가 존재하고, 도달한 자와 이르지 못한 자가 존재한다. 한번 봉에 오르면 떨어지지 않으려 끊임없이 올라가야 하고, 멘토와 선배란 이름으로 끌어주고 당겨주지만 오르는 것엔 분명한 순서가 존재했다. 나는 그런 곳을 찾아 헤매지 않았다. 내가 애타게 찾았던 세계는 종으로도 횡으로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곳, 정해진 일상을 넘어 모두가 각자의 속도와 근력에 따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곳. 어린 날처럼 종횡무진 함께 정글짐을 타듯 서로의 삶을 넘나들며 교류할 수 있는 세계였다.
불교에선 ‘세계’의 세를 전세, 현세, 내세를 뜻하는 시간적 개념으로, 계를 동서남북을 뜻하는 공간적 개념으로 풀이한다. 즉 하나의 세계를 설계하기 위해선 시간과 공간을 모두 구축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달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부산청년센터’란 이름의 공간이 시작되었다. 청년 각자의 세계를 지원하기 위한 공공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시간을 붙잡을 때다. 전국 17개 광역시도 중 11곳만이 관련 조례에 청년시설의 기능과 행정 역할, 예산 근거를 정확히 명시해 두었다. 타 시도의 흐름에 맞춰 이제 우리도 청년조례를 개정해 청년의 시간과 공간, 부산의 청년이 그려나갈 새로운 세계를 보장해야 한다. 시간을 붙잡는다면 오늘의 만남이 내일도 이어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내일 무엇을 함께 도모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시작될 것이다.
그동안 청년을 위해 마련한 여러 공간을 기억한다. 모두 최신의 장비와 넓고 깨끗한 공간을 조성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최신의 놀이기구가 아니다. 언제든 찾아가면 친구가 있고, 나와 같은 놀이를 도모할 수 있는, 나와 같은 기구에 올라 서로에게 역할을 부여해가며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설정할 수 있는 공터, 마음 내키는 대로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열려 있는 놀이터가 필요했다. 나는 여전히 동료를 찾고 있다. 나와 같은 고민과 나와 같은 언어를 쓰는 내 세계의 동료를 간절히 찾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낯선 이를 만나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도 맛보고 싶다. 그렇게 우리가 어린 시절 넘나들었던, 서로의 세계를 다시 만나고 싶다.
제목: 다시 만난 세계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700&key=20210519.22017005103&kid=023300